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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17세기 사행록

부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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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부심일기(赴瀋日記) 지은이 이경엄(李景儼)
사행당시직급 부사(副使) 기록연대 인조19
기록언어 한문

『부심일기(赴瀋日記)』는 이경엄(李景儼, 1579~1652)이 1641년(인조 19)에 동지사로 심양에 다녀오면 남긴 일기이다. 『연행록전집』에는 이경직(李景稷)의 글이라고 되어 있으나, 『부심일기』의 발문(跋文)에 ‘연천군(延川君)이 기록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경엄으로 수정해야 한다. 더구나 이경직은 이 사행이 있기 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인조실록』이나 『통문관지』, 『연려실기술』의 『사대전고(事大典故)』, 『동문휘고(同文彙考)』 등 사행 관련 자료에는 이 사행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부심일기』의 기록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부심일기』가 사행록으로 갖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심양(瀋陽)의 황제에게 가는 정식 사행의 기록이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있기 전까지 청나라에는 3사를 갖추지 않고 춘신사(春信使)나 추신사(秋信使)의 이름으로 무관(武官) 1명이 파견되었다. 1637년 강화 후 청나라와 군신의 예를 맺은 이후에는 명나라 황제에게 가는 사신과 똑같은 절차에 따라 3사가 심양으로 파견되었다. 1645년 청이 북경(北京)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사행은 명나라 때와 같이 북경으로 가게 된다. 이 사행은 약 8년 동안만 유지된 심양으로 가던 동지사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의 삼엄한 감시를 받는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황금을 비롯한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으며, 심양에서는 관소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특히 심양의 인질로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의 만남을 통제당했다. 또한 사행 도중 다른 명목의 사행, 교대를 위해 심양으로 가는 인질, 명나라 정벌에 동원되었다가 철군하는 군대, 소와 대나무와 군량 등의 공물을 운반하는 행렬 등을 만나기도 하였다.
셋째, 사행 노정 가운데 국외보다 국내 노정이 훨씬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청나라의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중국 땅에서의 견문은 엄혹한 자연 환경과 자신의 고생담으로 한정되었고, 정치적인 견해는 전혀 드러낼 수 없었다. 반면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노정은 맞이하는 관료는 물론 기생(妓生)까지 그 이름을 일일이 적고 있다.
『부심일기』의 말미에는 이경엄의 후손의 발문이 있다. 원두표와 곽성구의 자손들과 함께 조상이 남긴 글을 함께 보면서, 그들의 고생한 바를 함께 안타까워하고 싶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