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전체 목록 보기

심양일기
위로 이동 | 이전 페이지로 이동 | 다음 페이지로 이동
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심양일기(瀋陽日記) 지은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행당시직급 기록연대 인조22
기록언어

『심양일기』는 1637년(인조 15)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면서,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질로 심양(瀋陽)에 잡혀 갔다가 1645년 귀국할 때까지 8년 동안의 기록이다. 여느 일기체처럼 연월일순으로 날씨, 세자의 문안(問安), 일상 동정, 기타 사실을 기재하였다.
다만 여기서 다루고 있는 『심양일기』는 총 8년 동안의 기록이 아니고, 그 가운데 1644년 1월 20일부터 8월 18일까지의 기록이다. 또한 소현세자는 사신(使臣)이 아니고 볼모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심양일기』는 사행록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 황궁의 곁에 있으면서 조선과 청의 외교에 개입하는 일이 잦았고, 포로로 붙들려온 조선인들을 환속시켜 직영 농장(農庄)에서 일을 시키거나 귀국하는 사신편에 송환시키는 등 인질의 숙소였던 조선관(朝鮮館)이 대사관(大使館)의 역할을 했다는 연구도 있는만큼 넓은 의미의 사행문학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심양일기』는 총 8년 동안의 인질 기간이 아니고, 1644년 1월 20일 소현세자가 인조의 병환을 문병하기 위해 한양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2월 19일 한양 출발, 3월 24일 심양 도착, 4월 9일 청나라 군대의 산해관 공략에 동참하기 위해 출발, 6월 18일 심양으로 귀환, 8월 15일 인평대군(인조의 3남) 조선으로 출발, 8월 18일 소현세자의 청 황제 무덤을 참배하기까지 총 7달 동안의 기록이다.
『심양일기』에서 특기할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명나라의 멸망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심양에서는 전투에서 이길 때마다 북을 쳐 사람을 모아 그 사실을 공표했다. 4월 28일 “이미 2월에 명나라의 도적떼[李自成]가 북경 황궁을 함락시켰고,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 군대와 연합을 제안하였고, 4월 21일 마침내 함께 쳐들어가 도적떼를 물리치고 북경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5월 15일에는 황제가 직접 향을 사르며 하늘에 북경 함락을 고했고, 인평대군과 시강원의 관리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둘째, 청나라에 종속된 조선의 처지가 여실하게 보인다. 금주(錦州) 전투에 파견된 조선 화기병(火器兵)의 교체 병력이 조선과 금주를 오가는 장면이 포착된다. 척화(斥和)의 죄를 물어 공직에서 물러나게 했던 이경여(李敬輿)가 우의정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들어오자, 청나라는 그를 억류하며 조선에게 척화파를 쓰지 말 것을 다시 종용한다. 한양에서 심양으로 오던 중에 이 소식을 접한 소현세자는 이경여와 함께 면직되었던 이사(貳師) 이명한(李明漢)을 의주에 머물게 하여 논란의 여지를 없애고 있다.
셋째, 소현세자와 그를 호위하여 한양에 갔던 청나라 장수와 상호 접대를 통해 당시의 외교의 의전(儀典)을 엿볼 수 있다. 청장(淸將)이 침을 맞고 누워있자 소현세자가 위로방문의 뜻을 알렸다. 이에 청장은 몸이 불편해 마중 나가 맞아 들어올 수 없고, 방안에서 맞이한다 하더라도 돌아갈 때 나와 배웅할 수 없다며 방문을 거절하고 있다.
넷째, 심양에 억류된 인질들의 생활상이 드러난다. 소현세자가 산해관으로 종군하면서 호위를 담당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는 물론 세자시강원의 관원 대다수가 수행하자 인질로 들어온 대신들의 자제가 세자관을 지켰다. 김자점(金自點)의 아들 김식(金)의 경우 숙직 근무자 명단에 이름만 올려놓고 숙직을 서지 않았다는 기록이 여럿 보인다. 이진(李稹)은 숙소에서 청나라 여자와 가까이 한다고 하여 벌금으로 은자 10냥을 내기도 하였다. 심기원(沈器遠)이 반란을 시도하다 체포되었다는 밀서가 도착하자 소현세자는 비밀리에 신속히 인질로 와 있던 심석경(沈碩慶)을 체포한다. 도주하거나 청나라 정부에게 붙어 조선의 내밀한 움직임을 알리는 행위를 막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