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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17세기 사행록

임인음빙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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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임인음빙록(壬寅飮氷錄) 지은이 정태화(鄭太和)
사행당시직급 정사(正使) 기록연대 현종3
기록언어

『임인음빙록(壬寅飮氷錄)』은 정태화(鄭太和)가 1662년(현종 3)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進奏使) 연행을 다녀오면서 쓴 일기이다. 제목의 임인은 연행을 한 해의 간지(干支)이고, 얼음을 마신다는 뜻의 음빙(飮氷)은 북쪽을 다녀왔다는 말이다. 문집 『양파유고(陽坡遺稿)』 권14에 실려 있다.
이 사행은 강희제가 중국의 남부에서 복위 운동을 벌이던 옛 명나라의 잔여 세력을 물리치고 운남(雲南)을 평정한 것을 축하[進賀]하는 한편, 압록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고[耕作] 인삼을 채취[採蔘]하는 것을 방치한 의주부윤(義州府尹)인 이시술(李時術)의 책임을 물어 파면한 일을 보고[陳奏]하는 일이 주된 임무였다. 이시술의 일은 청나라가 국경 문제[邊禁]를 들어 칙사를 보내 직접 조사할 정도로 큰 문제였는데, 조정에서는 대통관(大通官: 청나라의 조선 통역) 이일선(李一善)에게 큰 뇌물을 주어 무마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결국 이시술을 죽이라는 청나라의 요청을 변화시켜 파면시키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대청 관계에 유연하게 대처하던 현임 영의정(領議政) 정태화를 정사로, 이전에 사행의 인삼(人蔘)과 염초(焰硝) 불법무역을 깔끔하게 해결했던 허적을 부사로 파견했던 것이다.
『임인음빙록』에는 병자호란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이야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우장(牛莊)에서 만나 황주(黃州)출신의 여인 오월양(吳月陽)과 그의 딸과 며느리, 사하참(沙河站)에서 만난 이복명(李福命), 계주(薊州)에서 만난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의 청지기를 하던 효길(孝吉), 북경에서 만난 한양 장흥동(長興洞)의 이웃이었던 최득룡(崔得龍), 남별궁(南別宮)의 노비였던 운이(雲伊)의 손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연행 노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지만 재상(宰相)이 연행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노라며 음식물을 올리며 정을 표하고 있다.
『임인음빙록』에는 현임 영의정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보인다. 장현(張炫) 등 노력한 역관들이 주선하여 3사의 경우 책문(柵門)에서 봉황성장에게 하는 현관례(見觀禮), 산해관에서의 수검(搜檢) 절차를 밟지 않는다. 또한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동안 무수한 지방관들이 달려와 문안을 하고, 지성으로 접객을 펴고 있다.
이 사행의 경우 특이하게 의원이 2명이다. 본래의 수행 의원 외에 청나라의 요청으로 어의(御醫) 안예(安禮)가 파견된 것이다. 안예는 병이 든 각노(閣老) 손이(蓀伊)에게 침과 뜸을 시술하였고, 사행이 북경을 출발할 때까지 치료가 되지 않아 뒤떨어졌다. 조선의 의술에 대한 청나라의 관심과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