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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17세기 사행록

조경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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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조경일록(朝京日錄) 지은이 김육(金堉)
사행당시직급 정사(正使) 기록연대 인조14
기록언어

『조경일록(朝京日錄)』은 김육(金堉, 1580~1658)이 1636년부터 1637년까지 동지사로서 북경을 다녀온 여정을 기록한 일기이다. 사돈인 선조의 부마 신익성(申翊聖)의 발문(跋文)에 따르면 김육은 명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바로 『조경일록』을 지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행본으로 편집되었지만, 나중에 문집인 『잠곡유고(潛谷遺稿)』 제14권에 수록되었다. 성균관대에서 영인한 『연행록선집(燕行錄選集)』에는 필사본으로 실려있다.
김육의 사행은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마지막 공식 사신이다. 김육이 북경에 체류하고 있던 1636년 12월, 조선은 청 태종의 공격을 받아 남한산성에서 농성전을 벌이다, 다음해 1월 30일 항복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청은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고,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는 끝이 났다.
『조경일록』에는 1636~7년의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반영되어 있다. 여순구(旅順口)를 거쳐 영원위(永遠衛)로 상륙하면서 긴 해로 여정을 마친 김육 일행은 청군이 산해관 인근에 출몰하는 것은 물론 그 일부가 장성을 넘어 북경 인근까지 가서 노략질하는 상황에 부딪치면서 거의 2달 동안 발이 묶였다. 청군의 공격이 약해진 틈을 타서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들어갔다. 김육은 예부에 길고 간곡한 글을 올려 해로를 등주로(登州路)로 바꾸어주고, 유황(硫黃)과 염초(焰硝)를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예부의 관리들은 뇌물이나 바랄 뿐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앞서 가도(島)의 명나라 장수 심세괴(沈世魁) 등의 협조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루지 못한다.
조선이 항복한 지 2달이 지나서야 그 실상을 전해들은 김육은 숙소인 옥하관 문을 나아가 통곡하였고, 예부에 글을 올려 조선의 입장을 변명하였다. 거기에 청과 조선의 연합군이 가도(島)를 함락시키고 명나라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신변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명의 관리들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푸대접했지만, 김육의 간곡한 태도에 병부상서와 황제가 호의를 베풀어 상과 여비와 호송군(護送軍)을 붙여 무사히 귀국하게 된다. 1년 만의 귀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