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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16세기 사행록

조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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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조천기(朝天記) 지은이 허봉(許篈)
사행당시직급 서장관(書將官) 기록연대 선조7
기록언어

『조천기(朝天記)』는 허봉(許)이 1574년 명 만력제(萬曆帝)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온 여정을 적은 일기이다. 상중하 3권으로 나뉘어져 있고, 부록으로 「과강록(過江錄)」이 있다. 상권은 5월 11일부터 6월 29일까지 49일간 동안 한양 출발에서 해주위(海州衛)에 도착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중권은 7월 1일부터 8월 30일까지 2달 동안 해주위를 출발하여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벌인 사행의 공식 일정과 견문을 기록하였다. 하권은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40일동안 황궁에 들어가 떠난다는 인사를 하고 의주에 도착하기까지의 귀정을 서술하고 있다. 부록 「과강록」에는 10월 11일 의주를 출발하여 11월 3일 한양 모화관(慕華館)에서 왕의 환영을 받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질정관(質正官)으로 함께 연행한 조헌(趙憲, 1544~1592)이 남긴 『조천일기(朝天日記)』보다 사행 여정에 대해서는 훨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천기』의 특징적인 면으로 다음의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요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지역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그는 요동에 들어서자 명나라 지방관들과의 교섭과 그들의 동태, 하정(下情)과 예물(禮物), 관리들의 탐욕, 방어를 위한 시설인 성(城), 못(池), 방어진지인 진(鎭)과 보(堡)의 연혁과 그들 사이의 거리, 요동인들의 풍속 등을 곡진하게 기록하였다.
둘째는, 당시 명나라의 학문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관심이다. 성리학(性理學)이 주류였던 조선의 학자답게 그는 시종 양명학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북경에 들어가기 전부터 엄숭(嚴嵩)의 『남궁주의(南宮奏議)』를 보았는데, 특히 설문청(薛文請)의 양명학을 창도한 왕수인(王守仁: 왕양명 王陽明)을 문묘(文廟)에 종사하자는 주장을 주의깊게 살폈다. 이후 북경에 들어가 국자감(國子監)의 학생인 섭본(葉本)을 만나 왕양명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의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거인(擧人: 중국에서 관리에 추천되거나 등용 시험에 응시하던 자. 또는 그 합격자) 왕지부(王之府)와의 대화에서도 양명학을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마지막으로 고구려 유적에 대한 기록도 이색적이다. 계주(薊州)의 별산점(別山店)에 있는 황량돈(糧墩)은 당 태종이 고구려에 패해 도주하면서 부하들의 사기를 올리고 고구려병이 추격을 잠시나마 막아보고자 흙을 10여 군데 쌓고 쌀 가마로 덮어서 군량을 저축한 것이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한 유적이라는 말을 전하고 있다.(물론 믿을 수는 없다고 첨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