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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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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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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조천록 (朝天錄 ) 지은이 이항복(李恒福)
사행당시직급 정사(正使) 기록연대 선조31
기록언어 한문

『조천록(朝天錄)』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1598년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파견된 진주사(進奏使)의 정사로서 북경에 다녀오면서 남긴 기록이다. 날짜별로 정리가 되어 있는데, 한시(漢詩)와 산문(散文)이 섞여 있다. 보고들은 것이 많고, 서사가 필요한 경우에는 일기의 형식으로 적었고, 감흥이 주를 이루거나 부사ㆍ서장관과 시를 주고 받은 경우에는 시로 일기를 대신했다. 함축적인 시어만 가지고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시 중간에 협주(夾註)로 구체적인 정황을 보였으나 다른 사행록에 비하면 정보량은 많이 부족하다. 일기 말미에는 들은 것을 기록한다[記聞]하며, 노정 중의 인상깊은 일화를 적어 놓았다. 이 『조천록』은 1629년 간행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고, 문집인 『白沙集』에는 별집 제5~6권에 실려있다.
연행의 동기가 된 정응태의 무고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선의 군신들이 명나라 장수 양호(陽鎬)와 결탁하여 천자를 기만하고 항거하려 했다. 둘째 왜구룰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범하고 요하(遼河)를 탈취하여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려 했다. 셋째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조선과 일본의 사신들이 서로 지극히 친절하다고 적혀있다. 넷째 연호를 기록함에 일본의 연호는 크게 쓰고 중국의 연호는 작게 표시하여 일본을 더 높이고 있다. 다섯째 임금을 태조(太祖)ㆍ세조(世祖)라 하여 천자의 칭호와 같이 ‘祖’자를 사용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은 1차로 7월 1일에 최천건(崔天健) 일행을, 2차로 8월 1일에 이원익(李元翼) 일행을, 3차로 10월 21일에 이항복(李恒福) 일행을 파견한 것이다. 결국 조선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과 부사 이정구가 작성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의 논리로 해명에 성공하여, 정응태를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