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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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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조천일기(朝天日記) 지은이 이상길(李尙吉)
사행당시직급 정사(正使) 기록연대 광해9
기록언어 한문

『조천일기(朝天日記)』는 1618년 이상길이 동지사로서 북경을 다녀오면서 남긴 견문록이다. 8월 27일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에 다녀오는 동안 보고들은 여러 가지 사실과 북경 체류 기간 동안의 여러 체험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길의 문집인 『동천집(東川集)』 권4에 실려있다.
사행의 초반은 병이 걸려 괴로워하던 자신에 대한 서술이 주를 이룬다. 산해관에 들어가 이틀 동안 앓다가 다시 출발하였다. 여기서부터 북경으로 가는 내내 가래와 기침이 끓어올라 기도를 막는 증상이었는데, 빨리 죽었으면 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였다. 풍윤에서 다시 이틀을 묵기도 하는 등 행차가 늦어져 동지 연의(冬至演儀)의 기일을 맞추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부사와 서장관만 달려가 겨우 자리에 들었고, 이상길은 끝내 참석하지 못하여 괴로워하였다.
북경에서부터 요양에 이르기까지는 역관들의 사무역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룬다. 북경에서 역관들이 교활하게 시세를 올려가며 돌아갈 기일을 늦추자 3사가 분노하여 역관 진예남(秦禮男)과 견후증(堅後曾)의 볼기를 쳤다. 그렇게 했음에도 역관과 상인들은 귀국하는 날까지 거래를 끝내지 못해 사행을 통주(通州)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머무르게 하였다. 겨우 출발하나 싶었는데 북경의 수레 주인들이 수레삯에 불만을 품고 길에다 짐을 부려 놓고 가버렸다. 다시 3사만 먼저 길을 떠나야 했고, 산해관에서 10일을 묵으면서 상인들을 기다렸다. 산해관의 수검(搜檢)에서 역관들이 밀반출하려던 염초(焰硝) 7,400근이 발각되고, 역관들의 발빠른 로비로 4,400근으로 줄여 몰수당하였다.
요양에서부터 한양에 복명하기까지는 폐모론과 관련한 조선 정세에 주목하고 있다. 자신과 가까운 서인 세력들이 줄줄이 유배를 당했다는 소식을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