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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17세기 사행록

조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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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조천일기(朝天日記) 지은이 홍호(洪鎬)
사행당시직급 서장관(書將官) 기록연대 인조10
기록언어

『조천일기(朝天日記)』는 홍호(洪鎬, 1586∼1646)가 1632년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추봉(追封)을 목적으로 하는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이 되어 해로(海路)로 북경을 다녀오는 과정을 적은 일기이다. 그의 주석에 따르면 본디 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로 작성되었다. 1632년 6월 1일 한양을 출발하면서 1633년 5월 복명하기까지의 여정인데, 한양에서부터 증산(甑山)의 석다산(石多山)에 이르기까지의 일정이 간략하게 그려지고, 1632년 9월 27일 영평(永平)에서 10월 3일 북경 입성 직전까지, 1633년 2월 4일부터 5월 복명하기까지의 귀환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이밖에도 북경 체류 기간에도 누락된 날들이 여럿 보인다. 문집인 『무주일고(無住逸稿)』 권4에 상ㆍ하(上ㆍ下)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이 사행의 주된 목적은 원종(元宗)의 추숭(追崇)을 허락받는 일이었다. 원종은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 1580~1619)을 말한다. 선조의 5번째 아들인 그는 인조반정(1623)을 계기로 대원군(大院君) 봉해지고, 1627년에는 논란 끝에 왕[元宗]으로 추존되었다. 인조는 다시 시호(諡號: 제왕이나 재상, 뛰어난 학자가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올리고자하여, 신하들과 큰 논쟁을 벌인 끝에 뜻을 관철시켜 주청사를 파견시키기에 이른다. 워낙 중요한 문제였기에 현임 예조판서 홍보(洪靌)를 정사로, 일찍이 북경을 다녀오고 뛰어난 문장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던[接伴] 이안눌(李安訥)을 부사로 삼았다. 결국 공량(恭良)이라 시호를 받아내 성공적으로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왔다.
『조천일기』에는 추숭을 허락받기 위한 3사의 노력이 자세히 적혀있다. 청나라 예부(禮部)의 질문 공세를 막고 쟁점을 피하기 위한 대책을 숙의하여, 작은 책자로 만들어 역관에게 주어 미리 답변을 준비하게 하였다. 또한 따로 차출한 제술관(製述官)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고, 당대 조선 최고의 문장가 가운데 하나인 부사 이안눌이 고치고 다듬어 예부에 올렸다.
이 사행이 간 해로(海路)는 1629년(인조 7) 영원위(寧遠衛)의 원숭환(袁崇煥 ?∼1630: 명말의 명장)이 가도(島)의 모문룡(毛文龍, 1576∼1629: 명말의 무장)을 견제하기 위해 각화도(覺華島)까지 와서 영원위를 거쳐 산해관으로 들어가는 등주(登州)로 가는 길보다 갑절이 더 긴 험난한 여정이었다. 3~4년 동안 무려 5명의 사신이 난파되어 죽었는데, 홍호 일행은 석다산 출항에 앞서 용왕(龍王)을 비롯한 바다의 신은 물론 이들 죽은 사행사들을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