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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조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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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김성일조천일기(金誠一朝天日記) 지은이 김성일(金誠一)
사행당시직급 서장관(書將官) 기록연대 선조10
기록언어 한문

『조천일기』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1577년(선조 10)에 사은 겸 개종주청사(謝恩兼改宗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다녀오면서 지은 일기이다. 1577년 2월 20일 압록강을 건너는 것을 시작으로, 6월 4일 산해관까지의 노정이 기록되어 있다. 일기 중간에 누락된 곳이 많고, 일기의 끝이 예외적으로 산해관에서 끝나고 있어 완본(完本)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일의 문집인 『학봉집(鶴峰集)』이나 속집인 『학봉속집(鶴峰續集)』의 편찬과정에서는 실리지 못하고, 편찬 과정에서 남은 작품들을 모아 놓은『학봉일고(鶴峰逸稿)』 제3권에 다른 『기묘일기(己卯日記)』, 『북정일기(北征日記)』와 함께 필사본으로 실려 있다. 『학봉집』 권1에는 『조천록(朝天錄)』이라는 편명 아래 사행에서 쓴 시를 모아 놓았고, 『학봉속집』 권1에 있는 『조천기행(朝天紀行)』은 이 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 편의 시로 노래하였다.
김성일은 『조천일기』에서 사행목적에 충실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의주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사행 도중의 어려움과 북방 이민족의 출몰로 불안정한 요동의 형세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북경 체류 기간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대한 내용이 아니면 아예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날씨가 어떻다는 짧은 기록이 있는 날과 종계 문제의 창구인 예부의 담당 관원들과의 대화 내용을 세세히 밝히고 있는 날만 있다. 북경 도착 직후부터 종계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몇 달이고 머물겠다고 통고하거나, 예부상서가『대명회전(大明會典)』을 인쇄하지 못하였으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말에 반드시 고쳐준다는 서약을 서면으로 요구하기도 하고, 편집본을 보여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예부에서 이런저런 핑계로 고친 내용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침내는 몇 년 동안 조선에서 상주했던 문서를 가지고 와서 조선 사신이 잘못될까 걱정하는 구체적인 대목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상주문에 쓰인 문구대로, 즉 조선이 원하는 표현 그대로 고쳤다고 해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친 글을 반드시 보고 가야겠다고 윤두수와 김성일은 떼를 썼고, 급기야 예조의 낭중(郎中)이 황제에게 떠나겠다는 인사[辭朝]를 한 외국의 신하가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몰아붙이는데 이르렀고, 김성일 일행은 그제서야 물러나왔다.
종계변무는 조선 전기 대명관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이 되는 일이었다. 1518년(중종 130년 『대명회전』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한 이후, 중종ㆍ인종ㆍ명종 3대에 걸친 60년 동안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辨誣]는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선조는 1573년 주청사를 보내 개정을 요구한 이후 2 ~ 3년에 1번씩 사신을 보내어 고쳤는지 여부를 확인하였다. 김성일의 사행 또한 공식적으로는 사은사였지만, 종계변무의 문제를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후 1584년 『대명회전』의 이성계 관련 부분이 개정되었으나 아직 발간 전이었고, 1588년에는『대명회전』 중 조선이 수록된 1권을 가지고 왔고, 1589년 11월 22일 성절사(聖節使)로 갔던 윤두수의 동생 윤근수(尹根壽)가 귀국하면서『대명회전』 전질을 가져오면서 종계변무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