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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금석산에서 강세작을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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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사행단이 금석산에 이르자 상판사의 우두머리 마부인 득룡이가 말몰이꾼들과 함께 금석산을 가리키며 강세작의 옛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강세작은 18살에 귀양온 아버지를 따라 요양에 와 있었는데 그 이듬해에 청이 쳐들어와 아버지 강국태는 산골짜기에서 화살을 맞고 죽고, 강세작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한 뒤 조선에서 온 강홍립의 진에 몸을 맡겼다. 청나라 병사들이 조선군을 쳐서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아 조선의 도원수 강홍립은 항복을 했다. 청군은 조선군에게 숨어들어간 명나라 병사를 샅샅이 뒤져내 모조리 죽여버렸다. 강세작도 역시 청나라 병사들에게 붙들려서 묶인 채 바위 아래 앉아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를 맡은 자가 강세작을 잊어버리고 가벼렸다. 그러자 강세작이 조선 군사에게 눈짓으로 묶인 것을 풀어달라고 애걸했으나 조선군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손 하나 까딱하는 이가 없었다. 강세작은 할 수 없이 스스로 돌 모서리에 비벼 줄을 끊고 죽은 조선 군사의 옷으로 갈아입어 위장을 한 뒤 조선 군대에 들어가 죽음을 모면했다. 강세작은 요양으로 돌아가 살다가 심양이 함락되자 봉황성으로 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도 전사하고 강세작은 금석산에 숨어들어 있다가 회령까지 가 조선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 2명을 낳고 나이 80이 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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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

요양

요양(遼陽)은 한나라 때에는 양평요양(襄平遼陽)으로 불리다가,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요동성(遼東城)이 되었고, 금나라 때에는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원나라에 이르러 요양현(遼陽縣)이 되었다. 고구려 이후 고려 공민왕(1330~1374)의 요동 정벌 시기에 잠시 고려의 판도에 들어왔다가, 다시 중국 땅이 되었다. 요양은 중국 사행 노정의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명나라 때에는 요양성 밖의 조선관(朝鮮館: 회원관 懷遠館)에서 하루밤을 묶고, 바로 서쪽으로 꺾어져 주필산(駐蹕山)과 해주위(海州衛)를 거쳐 곧장 광녕으로 갔다. 청나라가 되어서는 요양 시내에 들어서지 않고 태자하를 건너 영수사(映水寺)에서 묵고 심양으로 갔다. 요양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는 서문 밖에 있던 백탑(白塔)이었다. 8각에 13층, 높이는 70.5m인 백탑은 요동벌의 등대와 같은 존재였다.

인물 강세작(康世爵)

정의감에 불타고, 한번 길을 정하면 오직 그 한 길만 보는 성격이다. 위기의 순간에 재치를 발휘할 정도로 두뇌회전이 빠르고, 행동이 재빠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안다.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실천에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번 결정하면 후회하지 않고 그대로 따른다.

득룡(得龍)

어려서부터 중국인과 함께 살아 중국어에 능통하다. 열네 살 때부터 사행길을 따라 30여 차례 중국에 다녀와 중국의 사정에 밝음. 책임 있게 일을 잘해 사행단에서 의지하고 있다.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사행단에 구수하게 풀어내는 여유를 가지고 있음. 사행단이 책문을 지날 때 예단을 청인들에게 나누어주는데 상판사의 마두인 득룡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득룡은 욕을 하며 대드는 청인들의 가슴을 움켜잡고 때리는 시늉을 하며 큰소리를 칠만큼 대담하고, 거친 성격을 가졌다. 되놈들에게 호통을 치고 주먹을 휘두를 만큼 펄펄 날뛰는 모습이 호기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조군이 '살위봉법(殺威棒法)'이라고 할 정도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13)~ 1805(순조5)
호기심이 많고, 구경하기를 좋아한다. 학문이 풍부해 중국의 경제, 사회, 문학, 정치 등에 다양한 의견을 표함. 짓궂은 구석이 있다. 한문을 다루는데 능통하고, 책을 많이 읽어 아는 것이 많다. 은근슬쩍 잘난 체를 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다소 진지하지만 유머러스하게 말을 잘해 사람들을 웃게 한다. 소설 짓기, 말 타고 잠자기가 취미이고 화술과 재치가 뛰어나 많은 친구들과 교유를 한다. 사행을 다녀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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