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사행 이야기관>시놉시스>서양문물접속
URL

시놉시스

기괴한 러시아 풍속을 관람하다
위로 이동 | 다음 페이지로 이동
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아침에 러시아관에 가보니 ‘회동관(會同館)’이라는 편액을 달아놓았다. 여기가 바로 원래의 ‘옥하관(玉河館)’으로 옥하교의 서쪽 길가에 있다. 당초 우리나라 사신들이 머무르던 곳이었다. 지금 우리나라 사신들은 남관(南館)으로 이전했다. 러시아관은 집이 넓고 탁 트여 있어서, 남관에 비해 배나 넓고 또한 빈 공간도 많이 있었다. 집안의 기물이 섬세하고 기이했는데 치수를 재는 기계들은 방마다 있었다. 곳곳에 걸린 그림은 사람, 가축, 궁실, 수목, 산수 등을 그린 것이었다. 또 방마다 자명종이 있었고, 스스로 울리는 악기(축음기)가 있었는데 이것들은 감실처럼 생겼다. 러시아국 사람들은 10년에 한 번씩 번갈아 이곳에 머물렀다. 그 사람들은 얼굴이 하얬지만 몸에 난 털은 누랬다. 코가 날카롭고 우뚝하며, 눈이 우묵하고 노랬다. 키는 8척이나 되었다. 10여명을 보았는데 대체로 다 그랬다. 이곳저곳을 두루 구경하고 어떤 곳에 이르렀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자물쇠를 열게 하고 들어가 보았더니 머리와 사지에 쇠못이 박힌 사람이 걸려 있었다. 말몰이꾼이 이곳의 괴상한 모습에 대해 묻자 이곳에 사는 오랑캐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책을 꺼내 보여주었다. 과일 한 접시와 사과 한 접시를 가져왔기에 각각 1~2개씩 먹고 청심환과 담배 등의 물건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먹지 않는다고 사양하였다.

공간
쌍양점

사행단이 송산보(松山堡)에서 밥을 지어 먹고 주로 쌍양점(雙陽店)에 이르러 잠을 잤다. 무오연행록은 중국황제의 표문을 받고 떠나 쌍양점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하고 있는데, 무오연행록에서의 쌍양점은 마을 전체가 집집이 문을 닫고 길에 행인도 없으며, 죄인들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는 곳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미지 상세팝업 보기

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