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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도둑의 이야기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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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1776년에 영조의 죽음을 알리러 가던 고부사가 고교보에서 반씨의 집에 잤었는데, 반 씨는 서 씨와 함께 살았다. 우리나라 정주 사람인 방차동이 뜻밖의 일에 대비해 은을 가지고 수행했었는데 이날 밤에 은을 서 씨의 온돌방에 두고 그 위에서 잤다. 밤중에 방차동이 놀라 깨어 도둑이 방에 들어왔다고 크게 외쳤다. 서 씨가 온돌방 아래에서 자다 놀라 일어나 살펴보니, 은 1천냥이 없어졌고 온돌방의 창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그때 반 씨가 밖에서 들어왔다. 방차동이 어디 갔다오느냐고 성을 내자 반씨가 자신은 훔치지 않았다고 하고 차동과 함께 추적에 나섰다. 이웃에 정 씨의 가지 밭이 두 집 사이에 있었는데, 조선 사람의 비옷, 갓, 삼으로 만든 신이 울타리 사이에 떨어져 있었고 은을 쌌던 쇠가죽이 정 씨의 문에 떨어져 있었다. 관원이 이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형상을 금주부와 영원주에 알렸다. 금주지부가 반 씨, 서 씨, 정 씨 이 셋을 묶어 봉천부 장군에게 넘겼다. 서 씨는 은을 잃어버린 날 저녁에 반 씨의 처가붙이인 애꾸눈 아무개가 왔다 도망치듯 가고 보이지 않았다고 진술하여 수색해보았으나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황제는 금주, 영원, 성경 등의 관에 명령을 내려 은 1천냥을 조선 사신에게 내주라고 했다. 그리고 세 남자의 부인들을 형부에 잡아다 신문하였으나 처녀 때 아무 남자와 음란한 관계를 맺은 죄는 있으나 은은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황제는 6인을 풀어주고, 도둑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봉천 장군의 1년 봉급을 삭감했다. 사신이 돌아올 때 은을 돌려주었으나 받지 않아 그 은은 지금까지도 의주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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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책문

책문(柵門)은 변문(邊門)이라고 하는데 압록강과 130리가 떨어져 있다. ‘책(柵)’이란 한 길 반 길이의 나무를 늘어세운 것으로, 사람이나 말이 드나들 틈이 없고 나무를 가로대어 그 중간을 엮어 튼튼한 경계선이 되었다. 청나라는 봉황성으로부터 서쪽으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둘레 1,800여 리에 이르는 울타리를 쳤고, 그 중간에 총 17개의 문을 두었다. 그리고 각 문마다 지키는 관병을 두었고, 그 주위에 장정들을 선발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책문은 조선과 청나라의 실질적인 국경이었고, 그런만큼 일정한 통관 절차를 밟아야 했던 곳이었다. 연행사들은 역관을 보내 사신의 인적 사항와 인마(人馬)의 수 등을 적은 문서를 보냈고, 책문의 관리자인 봉성장(鳳城將)이 나와 인마를 점고하고 들여보냈다. 간혹 이 통관 절차를 엄격하게 할 때가 있어, 연행사들은 책문의 관리 책임자부터 말단의 호송 군조들에게까지 종이ㆍ부채ㆍ붓ㆍ담뱃대 등의 예물을 나누어 주었다.

인물 방차동(方次同)

조심성이 있지만 철두철미하지는 못해 지혜를 내어 은을 숨기려는 생각보다는 그저 품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당황하면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본다. 하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신중을 기하고 절차대로 할 줄 알 정도로 차분하다.

소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