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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리치의 맛에 감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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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수역이 아라비아에서 나는 참외 1개를 얻어다 바쳤는데 달고 상쾌한 맛이 아주 특별했다. 큰형님께서 병이 나셔서 날것이나 찬 것을 드실 수 없으므로, 모두 내 방에 갖다 놓고 식후에 썰어 먹었다. 최수창이 리치 5개를 얻어다 바쳤다. 마침 큰형님과 부사, 서장관이 와서 각각 1개씩 나누고, 나에게도 1개 보내왔다. 모양을 보니, 껍질은 반쯤 말라 있었지만 아직도 붉은색이 있었고, 백옥처럼 하얀 과육이 씨를 몇 겹으로 감싸고 있었었다. 껍질과 과육 사이에 과즙이 가득했는데, 꿀처럼 달았다. 껍질을 깔 때는 입으로 물어야 과즙을 흘려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싱싱할 때는 과육이 껍질 안에 가득 찼는데, 딴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과육이 물러서 과즙이 된 것 같다. 리치의 과육을 씹어보니 연하면서도 아삭대는 소리가 났다. 과육은 과즙보다 달지 않았고 조금 깔깔한 맛도 있었다. 예전에 들은 바에 따르면, 리치는 7월에 익는데, 따서 하루만 지나도 향이 변하고 이틀이 되면 색깔이 변하며 사흘이 되면 맛이 변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리치는 가지에서 딴 지 오래되었지만 맛이 아직도 이렇게 훌륭하니, 만일 나무 밑에 가서 바로 따서 먹는다면 그 맛이 얼마나 기막히겠는가? 하지만 현재의 맛으로 이야기한다 해도 다른 과실은 비교할 수가 없다. 과육 뿐 아니라 껍질도 매우 향기로운데, 아마 과즙이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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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인물 김창업(金昌業)

1658(효종9)~ 1721(경종1)
행동력 있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표현 역시 직접적으로 간명하게 하는 편이다. 비교적 수식을 많이 하지 않고 담백하게 글을 쓰고, 사고 역시 그러하다. 한 가지를 보더라도 감정적 서술보다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하여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한다. 해서 말도 그리 많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도 돌려서 말하지 않고, 담담하게 지적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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