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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망원경을 관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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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에게 망원경을 보자고 청했다. 그는 시중드는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조금 뒤에 나가자고 했다. 서쪽 처마 밑 종을 매달아 두는 누각의 북쪽에 이르렀다. 시중드는 사람이 이미 망원경을 해를 향해 설치하였는데, 의자를 놓아 앉아서 보게 되어 있었다. 망원경은 통을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크기는 조총의 통만 하고, 길이는 주척으로 3자 남짓했다. 두 끝에는 각각 유리가 끼어 있었고, 밑에는 외기둥에 3개의 발이 달려 이었으며, 위에는 기계가 놓여서 전체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한쪽 눈을 감고 해를 보았더니 햇볕이 둥글둥글하게 망원경의 통에 가득찼다. 마치 흐린 날씨에 해를 똑바로쳐다보아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아도 될 듯하였으니 참으로 신기했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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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심양

심양(瀋陽)을 요나라와 금나라는 심주(瀋州)라고 하였다. 원나라에 이르러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 하여, 심양(瀋陽)이라고 불렀다. 1634년에 후금의 지배층들이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뜻으로 ‘천권성경(天眷盛京)’으로 고쳐 불렀고, 1657년에 “하늘의 뜻을 받들어 운수를 잇다[奉天承運]”는 뜻을 가져와 심양성 안에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봉천이란 이름은 나중에 일제가 세운 만주국 시절에 잠깐 쓰였을뿐, 예나 지금이나 심양으로 불렸다. 청나라 때의 심양성은 또 하나의 수도라고 부르며, 모든 제도와 규모를 북경의 그것에 맞추었다. 그래서 그 규모와 화려함이 요양보다는 열 배나 더했으며, 북경에 버금갈 정도였다. 연행사들은 대남문(大南門) 근처에 있던 숙소 조선관에 짐을 풀고, 예단 가운데 일부를 봉천부에 납부하였다. 그간 사신들을 수행했던 의주(義州)의 군관(軍官)이 심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장계를 가지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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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인물 유송령(劉松齡)

1703 (추정)(숙종 29) 조선 사람들이 역법을 배우기 위해 천주당에 찾아와 잘 통하지도 않는 짧은 중국어로 자꾸 물어서 성가셔한다. 하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그 자세를 마음에 들어하고, 직접 선보이기까지 하는 홍대용에게는 선물도 주고, 이러저러한 질문에 필담과 통역관을 거치는 여러 힘든 과정을 참고 차분히 대답을 해준다. 침착하고, 역법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홍대용을 만났을 시에 62세였다.

포우관(鮑友官)

1701 (추정)(숙종 27) 홍대용이 만났을 시 포우관은 64세로 홍대용에게 자기나라의 위치와 문물 등에 대해 자세히 일러준다.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편이다. 마음이 약해서 조선 사람들이 자꾸 만나달라고 청하면 거절을 못하고 끝내 나와 성실하게 답변을 해주는 선교사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영조7)~ 1783(정조 7)
문학적 상상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의 표현을 보면 무척 호방하고 대범한 기질이 엿보인다. 시와 서에 능하고, 넓고 깊은 시야를 지녔다. 총명하고 비범하다. 장난끼도 가득해서 이러저러한 장난들도 많이 치고 농담하기를 좋아한다. 흥미로운 것들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배움에 대한 열의도 강하고,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의 제도와 중국의 제도에 대해 비교하며 배울 것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것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북경(北京)에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 사귀어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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