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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망해정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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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산해관 남쪽의 망해정을 시간을 내어 둘러보러 가는데, 정자를 관리하는 중국인이 청심환을 요구하였다. 망해정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 속이고, 망해정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머리털이 설 정도로 대단한 경관이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느끼게 되었다. 서쪽으로는 용왕묘가 있는데, 갈 길이 바뻐 들르지 못하고, 바닷가의 작은 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전족을 하고, 화려한 옷차림을 한 중국여인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공간
고교보

고교보(高橋堡)에서부터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는데, 넘쳐 흐를 듯하게 높다. 바다 남쪽이 곧 산동(山東)의 여러 읍들로 옛날의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의 땅이다. 동쪽은 우리나라 황해도 연안과 서로 통하니 숭정(崇禎) 이후에 명 나라로 들어가던 길이다. 고교보의 마을도 역시 번화하여 송산보(松山堡)와 서로 맞설 정도다.

영평부

영평부(永平府)는 무령현(撫寧縣)과 사하역(沙河驛) 사이에 있다. 중심부에 영평성이 있는데, 지형은 평양(平壤)과 건축 형태는 심양성과 비슷하였다. 한(漢)나라 때는 우북평(右北平), 당나라 때는 노룡새(老龍塞)라 하는 중국의 변경 도시였다. 그러나 이후 북방 유목민족들이 정권을 세우면서 도읍지의 근교가 되면서 민가와 점포들이 많아졌다. 더불어 사대부들도 늘어났다고 한다. 성의 중앙에 향시를 보는 시원(試院)이 있었고, 그 곁에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조선 사신들의 숙소가 있었다. 본래 봉성에서부터 서쪽으로 주부(州府)와 공참(公站)마다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찰원(察院)이 있어 조선 사신의 숙소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1년에 몇 번 사용하지 않아 관리가 소홀해지자 건물이 허름해졌고, 사행은 시설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개인 집을 빌어 숙소로 삼았다. 이 때문에 찰원이 모두 폐쇄되었다. 그러다가 심양에 오던 건륭제가 영평부에 이르러 조선관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수령을 파직하면서 다시 찰원을 수리하였다. 조선 사신들이 오면 관가에서 자진하여 탁자나 그릇을 준비해서 대접했는데, 19세기 이후 다시 문을 닫았다.

인물 홍대용(洪大容)

1731(영조7)~ 1783(정조 7)
문학적 상상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의 표현을 보면 무척 호방하고 대범한 기질이 엿보인다. 시와 서에 능하고, 넓고 깊은 시야를 지녔다. 총명하고 비범하다. 장난끼도 가득해서 이러저러한 장난들도 많이 치고 농담하기를 좋아한다. 흥미로운 것들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배움에 대한 열의도 강하고,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의 제도와 중국의 제도에 대해 비교하며 배울 것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것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북경(北京)에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 사귀어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소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