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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북경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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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북경 팔경의 하나로 새벽달을 구경하는 노구교를 건너 정오에 제독이 내려준 신분증을 가지고 와서 우리 일행에게 조양문을 통과해 북경으로 들어오라고 전달했다. 동악묘에 도착하자 일꾼들이 잔칫상을 준비해놓고 안부를 물으며 차를 대접해주었다. 상사와 부사와 함께 동악묘 안을 구경하고 어두워지자 다른 일행들과 함께 짐을 들고 조양문으로 들어가 옥하교를 건너 회동관에 숙소를 정했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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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융복사

융복사(隆福寺)는 인수방(仁壽坊) 동쪽 사패루(四牌樓) 마시(馬市) 북쪽에 있는데, 명(明) 나라 경태(景泰) 때에 남문 안의 상봉전(翔鳳殿) 목석(木石)을 거두어다 지었고, 옹정(雍正) 때에 중수(重修)하여 라마승(喇僧)을 살도록 하였다. 절 가운데에서는 으레 한 달에 세 번씩 장을 여는데, 8일부터 시작해서 10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철시한다. 절 가운데에 전각이 첩첩이 들어박이고 불상이 화려하게 베풀어져 있었다. 전후 좌우엔 물건을 반드시 종류별로 구분해서 각각 벌여 놓았는데, 서책(書冊)은 동쪽에, 주옥(珠玉)은 서쪽에 벌여 놓았다.

인물 홍익한(洪翼漢)

1586(선조19)~ 1637(인조15)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으로 자신이 나서야할 때라고 판단될 때 열정적으로 나설 줄 안다. 부러지더라도 굽히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나 평소에는 담담하게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편이다.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다. 나라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으며 좋은 풍경 앞에서 문학적인 표현을 쓰기도 하는 운치 있는 성격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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