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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북경의 생활상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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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북경 안에 사람들이 사는 집에는 화장실이 없고 배설물은 모두 그릇에 받아서 버린다. 성안의 궁벽한 거리에는 이따금씩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집에서 배설물을 버리는 곳이다. 그 배설물 그릇은 요강 같거나 술 담는 그릇과 같아서,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 보면 술그릇으로 알고 들어 마신다. 만주인도 역시 우리나라 요강을 가져다 밥그릇으로 썼다니 참으로 똑같은 일이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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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인물 이의현(李宜顯)

1669(현종10)~ 1745(영조21)
제도와 건축 등에 대해 우리나라와 일일이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기를 좋아한다. 작은 나라가 아닌 주체적인 국가로서의 우리나라를 생각하고, 중국 황제의 사치스러운 면에 대해 회의적으로 기술한다. 하지만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풍자적인 서술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면서도 그 속에 뼈를 느낄 수 있게 함으로서 해학의 미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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