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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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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주방에 불이 났는데, 통관들과 갑군은 불을 보고만 있지 감히 끌 엄두를 못냈으나, 역졸들이 지붕위로 올라가 기와를 걷어내고 물을 부어 불을 껐다. 이에 한 역관이 말하길, 중국인들은 불을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한다고 하였다. 이에 농담으로 북벌 시 화공을 하면 쉽게 이기 않겠는가 했더니, 물차가 있어 금새 불을 끌 수 있다고 다른 역관이 말하였다. 중국인들은 불을 엄히 단속하여 햇불을 쓰는 일도 없고, 집도 대부분 기와집으로 지었다. 만일 중국인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초가로 만든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에서 햇불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을 본다면 잠시도 살지 못할 것이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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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인물 홍대용(洪大容)

1731(영조7)~ 1783(정조 7)
문학적 상상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의 표현을 보면 무척 호방하고 대범한 기질이 엿보인다. 시와 서에 능하고, 넓고 깊은 시야를 지녔다. 총명하고 비범하다. 장난끼도 가득해서 이러저러한 장난들도 많이 치고 농담하기를 좋아한다. 흥미로운 것들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배움에 대한 열의도 강하고,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의 제도와 중국의 제도에 대해 비교하며 배울 것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것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북경(北京)에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 사귀어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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