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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계주의 독락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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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계주에 들어갔다. 성 서쪽 안에 독락사가 있는데 견줄 바 없을 정도로 굉장했다. 가운데에는 장육불이 있었는데, 목 아래는 6길이고 허리는 몇 십 아름이나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성 밖을 나오니 길가에서 배를 팔고 있는 한인 3명이 있었다. 군관과 역관이 은전을 가지고 값을 흥정할 때였다. 갑자기 청나라 사람이 말을 몰고 달려왔는데, 한인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값도 묻지 않고 배 절반을 가져다주고 나머지는 두 소매에 넣고 달아났다. 한인이 청나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간
금석산

금석산(金石山)은 정석산(頂石山), 해청산(海靑山)이라고도 하였는데, 황금색 돌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와 함께 “높고 웅장하며 마치 벽처럼 깎은 듯 솟아 있다.”고 설명하는 사람과 관악산이나 도봉산과도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종합하여 볼때, 제법 험준한 바위산 임을 알수 있다. 현재는 이와같은 지명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의 오룡산(五龍山)이 아닌가 짐작된다. 사행단이 도강 후 보통 구련성에서 첫날 밤을 묵으면, 그 다음날 새벽에 출발하면 금석산 아래에서 아침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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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녕

광녕

현재 북녕(北寧)으로 이름이 바뀐 광녕(廣寧)은 명나라 때부터 북방의 이민족을 감시하는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순무(巡撫)와 총병(摠兵)의 지휘 아래 대규모 군사가 주둔했던 곳으로, 성곽 위에는 창검과 깃발이 늘어서 있어 조선 사신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광녕성 한가운데에는 이성량(李性樑)의 패루(牌樓)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성량은 16세기 후반 요동 지역을 책임졌던 군인으로 그 할아버지는 죄를 짓고 압록강을 건너간 조선 사람이었다. 이성량의 아들은 이여송(李如松)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에서 왜적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패루는 문(門)처럼 생긴 석조 건축물로 용이나 호랑이 등이 문양을 정교하게 새기고, 공적을 기록하였다. 이성량이 오랑캐를 정벌한 공을 기려 세운 이 패루는 산해관 동쪽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여 사신들이 꼭 둘러보는 명물이었다. 광녕의 북쪽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의무려산의 신을 모신 북진묘(北鎭廟) 또한 조선 사신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인물 성이성(成以性)

1595(선조28)~ 1664(현종5)
의식주와 여행에서의 고난에서 오는 본능적인 것에 대한 기술을 즐겨했다. 대군과도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스스럼없이 지낸다. 길고 험한 여행길에서 오는 다양한 고난들에 대해 솔직하고 위트 있는 문체로 기술을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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