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록(朝天錄)』은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이 진사사(陳謝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 1587년 3월 13일부터 9월 13일까지를 일기 형식으로 날씨, 만난 사람, 방문 지역, 공무수행 과정 등을 자신의 느낌과 함께 기록한 글이다.
이보다 한해 전 1586년 하절사(夏節使) 윤자신(尹自新, 1529~1601) 일행이 옥하관(玉河館) 방의 온돌을 손보다가 화재가 발생하여 11칸을 태웠다. 이어 동지사(冬至使) 정사(正使) 성수익(成壽益)과 서장관(書狀官) 유영순(柳永詢)이 진헌방물(進獻方物) 중 나전함(螺鈿凾) 안의 소합(小合) 네 개를 도둑맞았다. 선조(宣祖)는 만력제(萬曆帝) 신종(神宗: 1563~1620)에게 이를 사죄하고자 배삼익을 정사로, 원사안(元士安)을 서장관으로 하는 진사사를 파견하였다. 황제는 칙서를 내려 왕의 충성과 근신함이 칭찬할 만함을 포장(褒獎)하고 망의(蟒衣)와 채단(綵段)을 내려 주었다.
하지만『조천록』에는 본래의 목적인 사죄에 대한 것보다 잘못되었던 태조 이성계 관련 사항을 바로잡아 새로 찍는『대명회전(大明會典)』의 해당 문면을 베껴온 사실을 더 크게 다루고 있다. 또한 특기할 일은 옥하관 화재 때문에 명나라가 옥하관에 묵는 조선 사신들로 하여금 밤에 등불도 켜지 못하게 한 일과 사행 도중 죽은 곽지원(郭之元)의 일이다.
곽지원은 명종ㆍ선조 때의 유명한 역관이다. 그는 1560년(명종 15) 사행 도중 여양역(閭陽驛)에서 1만 명의 오랑캐[㺚賊]에게 포위되었을 때, 역승(驛丞)이 항복하려 하자 “그대는 수관(守官)으로서 직무상 마땅히 죽음으로써 대적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항복하려 하니 법으로 참(斬)해야 마땅하다.”하고는 광녕(廣寧)의 군사 한 사람을 잡아 화살촉으로 귀를 뚫고 주리를 틀었다. 이에 역승이 크게 겁을 먹고 비로소 성 위에 올라 경계하여 지키고 일행 중의 군관 등도 편전(片箭)으로써 적을 쏘니, 적이 포위를 풀고 물러간 일화를 가지고 있다.
사행정보 테이블
사행명 |
진사사(陳謝使) |
사행목적 |
1586년에 옥하관에 화재가 나서 건물 일부가 무너지고, 황제에게 바치는 방물 일부를 도적맞은 것을 사죄하러 보낸 사행이다. |
시대 |
1587년 선조20(명(明) 만력(萬曆) 15년) |
사행기간정보 |
출발일 :1587년(선조 20) 3월 13일 북경도착일 :1587년(선조 20) 6월 5일 북경출발일 :1587년 7월 12일 귀경일 :1587년 9월 13일 |
사행공간정보 |
요동 회원관(懷遠館), 안산역(鞍山驛), 해주위(海州衛), 우가장(牛家庄), 고평(高平), 반산(盤山), 광녕(廣寧), 십삼산(十三山), 고교포(高橋鋪), 행림소(杏林所: 중후소 中後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