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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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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정녀묘를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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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노군둔(老君屯)과 왕아두점(王丫頭店)을 지나 몇 리를 가다가 왼쪽의 작은 길로 1리쯤 가서 정녀묘(貞女廟)에 닿았다. 들판 한 가운데에 작은 언덕이 솟아 있었는데, 정녀묘는 그 언덕 위에 바위를 깎아 집을 지어놓은 것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정녀(貞女)의 성은 허씨(許氏)이고 이름은 맹강(孟姜)으로, 그 남편 범랑(范郞)은 진(秦) 나라 때 만리장성을 쌓다가 죽었다고 한다. 남편이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자 정녀는 남편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다가 결국 자신도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뒷사람들이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한 여인의 조각상을 만들어 세웠다. 정녀의 조각상 옆에는 두 아이의 조각상도 나란히 서 있는데, 왼쪽 아이는 일산을 들고 있고 오른쪽 아이는 허리띠를 들고 있다. 두 아이는 정녀의 아들들이다. 일산은 당시 정녀의 행장을 상징하는 것이고 허리띠는 남편의 평상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공간
영평부

영평부(永平府)는 무령현(撫寧縣)과 사하역(沙河驛) 사이에 있다. 중심부에 영평성이 있는데, 지형은 평양(平壤)과 건축 형태는 심양성과 비슷하였다. 한(漢)나라 때는 우북평(右北平), 당나라 때는 노룡새(老龍塞)라 하는 중국의 변경 도시였다. 그러나 이후 북방 유목민족들이 정권을 세우면서 도읍지의 근교가 되면서 민가와 점포들이 많아졌다. 더불어 사대부들도 늘어났다고 한다. 성의 중앙에 향시를 보는 시원(試院)이 있었고, 그 곁에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조선 사신들의 숙소가 있었다. 본래 봉성에서부터 서쪽으로 주부(州府)와 공참(公站)마다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찰원(察院)이 있어 조선 사신의 숙소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1년에 몇 번 사용하지 않아 관리가 소홀해지자 건물이 허름해졌고, 사행은 시설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개인 집을 빌어 숙소로 삼았다. 이 때문에 찰원이 모두 폐쇄되었다. 그러다가 심양에 오던 건륭제가 영평부에 이르러 조선관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수령을 파직하면서 다시 찰원을 수리하였다. 조선 사신들이 오면 관가에서 자진하여 탁자나 그릇을 준비해서 대접했는데, 19세기 이후 다시 문을 닫았다.

러시아관

악라사관(鄂羅斯館)은 옥하관 뒷거리인 건어호동(乾魚衚衕) 반 리쯤 못 가서 있다. 악라사는 혹 아라사(阿羅斯)라 일컫기도 하고, 혹 아라시(俄羅嘶)라 일컫기도 한다. 악라사는 또한 대비달자국(大鼻韃子國)이라 한다. 이는 몽고족을 달자(韃子)라고 하여 몽고 서쪽에 있는 코 큰 인종의 나라라는 뜻에서 그리 부른다. 악라사는 흑룡강 북쪽에 있다. 그 나라는 지역이 매우 커서 동서가 3만여 리, 남북이 2만여 리가 된다. 동남쪽에는 유구와 안남(安南)이 접해 있고, 동북쪽에는 몽고가 접해 있고, 서남쪽에는 크고 작은 서양(西洋)이 접해 있다. 서쪽으로 통하는 사막의 바깥은 몇 만 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며, 동쪽으로 중국과의 거리는 5만 리가 된다 하였다. 악라사는 중국과 통상하지만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조공도 바치지 않는다. 사신들이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가보면 관 안에는 만주와 중국 책이 있고, 악라 글자로 번역하여 작은 글자로 베껴 쓴 것이 있는데 범서(梵書)같다. 탁자 위에 자명종이 있는데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소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