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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중과 농짓거리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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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십삼산 마을 뒤의 절에 생황을 잘 부는 중이 있다기에 그를 불러다 불게 하였다. 그 소리가 맑고 시원스러워 들을 만하였다. 역관 중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을 시켜 화답하게 하였다. 그 중은 속인의 옷과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말과 태도가 허랑방탕해보여 산사람 티가 전혀 없어 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경을 읽을 때에만 중의 모자를 쓰고, 경을 읽지 않을 때는 속인들처럼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는다고 했다. 내가 조롱삼아 그렇다면 마땅히 아내도 있을 것이라 했더니 중이 어찌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느냐 반문하였다. 그래서 내가 고기 먹는 중이 어찌 장가는 안 갔느냐 물었더니 비록 고기는 먹을 망정 참말 아내는 없다 했다. 그래서 내가 젊은 색시들이 중의 아내가 아니겠느냐 했더니 듣던 사람들이 크게 웃어댔다. 중도 웃으며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중에게 종이부채 몇 자루를 주었더니 자신은 중이라 받을 필요 없다 하여 그래도 중다운 말을 한다 싶었는데, 문에 나서면서는 다시 그것들을 달래서 가져 갔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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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북경

북경은 옛 연나라 때의 수도였으며, 금나라 때에는 연경(燕京), 원나라 때에는 대도(大都)라 불렸다. 명나라가 건국된 뒤에 수도가 남경(南京)에서 여기로 옮겨오면서 북경(北京)이라 불렸고, 청나라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수도였다. 황제가 살고 있다 하여 황경(皇京), 제경(帝京), 경사(京師)라고 불렸다. 조선 사신은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면서 공물을 바치고, 외교 관계를 맡고 있는 예부(禮部)를 비롯한 해당 관청에서 현안을 논의하는 등 공식 일정을 수행하였다. 사신들은 공식 일정이 없는 날에는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거나 때에 따라서는 북경 시내를 구경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관리와 문인(文人), 시정의 상인(商人),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하였다. 또한 중국 정부를 통해 받거나 유리창(遊離廠) 등의 서점에서 직접 구입한 서적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자양분을 이루었다. 사신을 수행한 역관과 상인들은 숙소에서 시장을 열어 국제무역의 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인물

헐렁하고 방탕해 보이는 인상으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예술가인 것 마냥 모자를 쓰고 다닌다. 노래를 곧잘 부르고, 고기도 먹고, 노래에 대한 대가를 받는 중으로 속인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도리어 속인보다 속세적인 것을 밝히고, 낯이 두껍다.

홍대용(洪大容)

1731(영조7)~ 1783(정조 7)
문학적 상상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의 표현을 보면 무척 호방하고 대범한 기질이 엿보인다. 시와 서에 능하고, 넓고 깊은 시야를 지녔다. 총명하고 비범하다. 장난끼도 가득해서 이러저러한 장난들도 많이 치고 농담하기를 좋아한다. 흥미로운 것들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배움에 대한 열의도 강하고,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의 제도와 중국의 제도에 대해 비교하며 배울 것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것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북경(北京)에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 사귀어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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