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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천주당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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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비가 오는 날, 천주당에 가보니 나무는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은 것이 중국의 건축양식과는 많이 다르다. 안으로 들어가니 깊은 골짜기와도 같았고, 어린아이와 여인, 그리고 노인 등을 비롯하여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건물은 3개의 기둥이 있는데 북쪽 벽에 불당과 같은 나무로 된 것이 있고, 그 곳에도 부인이 어린아이 보호하는 그림을 비롯하여 노인이 십자가에 매달려 떨어지려는 아이를 받으려하는 그림이 있었는데, 이 그림은 괴이하여 별로 좋은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아이는 야소이고, 여인은 야소의 어미라 하였다. 그 밖에도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이곳 천주당은 근래에 불이나서 다시 지었는데 어느 작은 문을 열어보니 개를 그린 그림이 있고, 그 밑에 살아있는 개가 있는데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서쪽에 의기를 담아두는 집이 있는데 관리자가 구경을 허락치않아 매우 아쉬웠다.

공간
십삼산

십삼산(十三山)은 봉우리가 13개라서 붙은 이름이다. 보잘것없는 바위산이 줄지어 있을 뿐이지만, 그나마 연행길에 중요한 표지 역할을 했다. 가면서 보면 12봉우리지만 돌아올 때 보면 13봉우리라 한다. 십삼산에대한 다른 견해로는 원래 이름은 석산(石山)인데, 발음이 ‘십삼(十三)’과 비슷해서 와전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처럼 보이고, 가까이서 봐도 봉우리가 확연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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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인물 이덕무(李德懋)

1741(영조17)~ 1793(정조17)
약간은 거칠고, 직선적인 성격이다. 정의감이 있고,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는 추진력도 있다. 상대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마두들을 때리기도 하는 등 과감하고 거침없다. 사건, 사고에 대해 관심이 많고, 그것에 대한 기록을 즐긴다. 풍경과 약재 등에 관심이 있다. 여러 가지를 보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성사되지 못했을 때 크게 아쉬움을 느끼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