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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청나라 역관들이 인삼을 가지고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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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아침에 곡을 한 후에 정명수가 이만석과 통사를 데리고 방물을 가지고 가 대궐에 바쳤다. 잠시 후에 정명수가 와서 말하길 일행 중 하인배들이 인삼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모두 내놓고 후환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즉시 대문을 닫고 안팎이 서로 통하지 않게 한 뒤에 두 숙소에 있는 사람들의 짐을 수색하여 중문밖에 내놓게 하였다. 정명수와 만주인 관리가 일일이 조사하여 상관에게는 200근을 하관에게서도 40근을 얻었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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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인물 성이성(成以性)

1595(선조28)~ 1664(현종5)
의식주와 여행에서의 고난에서 오는 본능적인 것에 대한 기술을 즐겨했다. 대군과도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스스럼없이 지낸다. 길고 험한 여행길에서 오는 다양한 고난들에 대해 솔직하고 위트 있는 문체로 기술을 할 줄 안다.

정명수(鄭命守)

강직하고 성실하다. 착실하고 조용한 성격이다.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손해일지를 계산하지 않고, 바르고 옳은 것을 실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더 중시하고, 체면을 따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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