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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청나라의 관복 제도를 살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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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군관과 역관들은 모두 관복을 갖춰 입었으나, 나의 옷차림은 종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그러나 나는 표범가죽과 털옷을 입고 종까지 두고 있었기에 만주족 사람들이 눈여겨 보았다. 그래서 결국 표범가죽 털옷을 벗고 종을 물린 채 하인들 틈에 섞여 두루 구경하였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자가 있으면 이곳 사람들이 종을 일컫는 '빵즈'라고 대답했다. 만주인들은 평상시 검정색 옷을 입어 귀천의 구별이 없었는데, 오늘은 모두 관복을 갖추어 입었다. 관복은 피견(被肩)ㆍ접수(接袖)ㆍ마척흉(馬胷) 등으로 불리는 것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머리에 쓰는 모자와 대판(帶版)ㆍ방석ㆍ보복(補服)은 등급에 따라 모양이 각각 달랐다. 우리나라는 스스로 '관복을 잘 갖춘 나라'라고 말하지만, 신분의 귀천과 등급을 분별하는 장식은 고작 허리띠와 망건 옆에 매다는 줄인 관자 정도에 불과하다. 보복의 경우에는 애당초 문무 귀천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풍모가 장대한데다 자태가 당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둘러보니 본래 왜소하고 마른 데다 또 먼 길을 여행하느라 풍파에 시달린 뒤였기 때문에 세 사신을 제외하고 모두 꾀죄죄했다. 입고 있는 의관도 대부분 여기에 와서 돈을 주고서 빌린 것이기 때문에 도포는 길이가 맞지 않고 모자 역시 커서 눈까지 내려왔다. 온전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으니 더욱 한탄스러웠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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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인물 김창업(金昌業)

1658(효종9)~ 1721(경종1)
행동력 있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표현 역시 직접적으로 간명하게 하는 편이다. 비교적 수식을 많이 하지 않고 담백하게 글을 쓰고, 사고 역시 그러하다. 한 가지를 보더라도 감정적 서술보다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하여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한다. 해서 말도 그리 많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도 돌려서 말하지 않고, 담담하게 지적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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