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에 대한 내용
자제군관의 복식
군관들은 철릭을 입었다. 자제군관 역시 군관과 같은 옷을 입었다. 자제군관으로서 사행길을 갔던 김창업이 자신의 의복에 대해 기록해놓은 것이 비교적 자세한데, 김창업은 도강 전에는 흰색 도포를 입었다가, 도강할 때 군관들이 철릭으로 갈아입자 자신도 회색 창의로 갈아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의는 벼슬아치가 평소에 입던 옷으로 뒷솔기가 갈라져 있는 옷이다. 여기에 황갈색[沈香色] 띠를 매었고, 칼과 주머니를 안장에 걸었다. 철릭은 소매가 넓어 도포와 비슷한데, 양옆이 트여 있지 않고, 허리 아래로 주름이 잡혀 있다. 원래 윗옷과 치마를 따로 재단해 허리에서 치마주름을 잡아 연결시킨 외투로 군복의 일종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윗옷과 치마의 비율이 거의 같았는데 후기로 갈수록 치마가 두 배 이상 되었다. 소매도 크게 넓어져 결과적으로 도포와 비슷해졌다. 군복이기는 하더라도 관아의 아전, 양반관료에 딸린 겸인(傔人)들도 많이 입었다. 철릭과 함께 가슴에 띠를 둘렀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살펴보면 모든 양반들의 가슴에는 반드시 술띠가 둘러져 있다. 중인들도 가슴에 술띠를 둘렀지만, 대개 검은색이었다. 특히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 앞에서는 검은색을 띠어야했다.
청나라 일반남자의 복식
남자들의 의복은 부자거나 사치한 사람이 아니면 모두 굵은 베를 쓰며,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헝겊신을 신었다. 이 신은 모두 검은 비단으로 되어 있는데, 털을 싼 무명을 바닥에 깔아 놓아 부드럽고 질기다.
상하 의복에는 허리띠나 옷고름 같은 것이 없고 모두 홑단추를 썼다. 바지 역시 좁아서 겨우 다리통이 들어갈 정도인데, 허리 아래쪽은 꿰매지 않고 터놓아 마치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입는 개구멍바지와 같다. 다만 단추만으로 양쪽을 연결하고 있어 용변(用便) 볼 때 편하게 되어 있다. 버선 길이는 가죽신과 같은데 무릎 아래쪽에다 잡아매어 놓았다. 그래서 앉을 때는 반드시 의자나 탁자에 걸터앉고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잠시도 웅크리고 앉거나 꿇어앉지 않았다.
갖옷을 입을 때는 반드시 뒤를 터놓으니, 이는 말을 탈 때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종친(宗親)이나 각라(覺羅: 청나라의 황족)들은 양편을 한 자쯤 터놓아 스스로 구별이 되게 했다. 이 밖의 여러 가지 복식은 만(滿)∙한(漢)의 구별이 없다.
하인의 복식
“하인들은 짧은 옷에 전립을 썼다”고 하는데, 짧은 옷은 두루마기나 철릭 같은 외투가 아니라 그냥 저고리 차림을 말하는 것도 같다. 저고리는 아무리 길어도 무릎을 내려오지 않는다. 바지로 보면 잠방이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 바지는 통이 넓은 바지와 좁은 바지로 나뉘는데, 통이 넓은 바지는 활동하기 편하도록 발목 부위에 대님을 쳤다. 통이 좁은 바지는 노동복으로 많이 있었으며 대님을 하지 않았다. 여름 노동복인 잠방이는 길이가 무릎 언저리까지만 내려와 아예 대님을 칠 수 없을 정도였다. 외출하거나 먼 길을 떠날 때는 무릎 아래에 행전(行纏)을 쳤다. 행전은 폭이 일정한 헝겊을 아래쪽으로 감아 소맷부리로 만들어 그 속으로 발목과 정강이를 넣어 감싼 다음, 위쪽에 끈을 달아 무릎 아래에 둘러매는 것을 말한다. 여유가 있는 하인이나 여름이 아닌 계절에는 긴 길이의 바지를 입고, 행전을 쳐서 활동력과 보온을 꾀했다. 하지만 여름철이거나 여유가 없는 하인들은 잠방이 차림으로 나설 것이 분명하다. 비가 많고, 길이 늪으로 변하는 요동벌의 장마 기간에는 오히려 편할 수도 있겠다.
마두와 하인들이 쓰는 전립(氈笠)은 벙거지일 것이다. 마부와 하인들은 신발은 짚으로 삼은 짚신[草鞋]이나 마로 삼은 미투리[麻鞋]였다. 미투리는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이 신었으니, 식구들에게 노자까지 다 털어주고 온 사람들은 짚신도 감지덕지였다. 비가 오거나 걸어 강을 건널 때면 맨발이 되었고, 눈이 많이 내리면 짚이나 헝겊으로 발과 신발을 한꺼번에 묶어 미끄러지거나 눈 속에 신발을 빠뜨리는 일을 방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