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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태상황 빈전에서 곡반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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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경운문 밖에서 1,000여명 남짓 되는 사람들과 어울려 곡을 하였는데, 경운문 안에서 곡소리가 나면 밖에서도 따라서 곡을 하였다. 사람들은 경운문 밖에 사정이라는 황제가 활을 쏘는 정자에 장막을 쳐서 각 부의 이름을 써놓았는데 낮에는 거기서 기다리다가 하루에 3번 곡을 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 황제의 명으로 경운문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니 신년하례식 때와 같은 의장이 서있었고, 태상황이 사냥할 때 탔음직한 백마 10여필이 서있었다. 문안에서 곡하는 사람은 삼품이상으로 수천명도 넘어보였고, 전안에서 곡을 하면 따라서 곡을 하는 등 절차는 문 밖과 동일하였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태국의 사신과 회자국의 사신도 있었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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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회동관

명나라 시기에 외국의 사절단을 접대하는 전문 관사로 회동관을 두었는데 이 회동관은 현재 북경의 왕부정 거리 동단 삼조호동(三條胡同)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명나라 시기에 이용되었던 회동관은 여러 나라 사절단들이 모두 머무는 곳으로 조선의 전문사관은 아니었다. 회동관의 대문 안은 방물(方物)을 보관하는 벽돌 대청이고, 그 안은 정사의 하처이며 또 그 안은 부사의 하처이고 또 그 안은 서장관의 하처이며, 또 북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주방과 닿아 있다. 또 마방(馬房)은 관 밖의 성 밑에 있으며, 방료 군관(放料軍官)이 역마와 구인(驅人)들을 데리고 함께 있는 곳이다. 상방과 부방의 서자(書者)들은 홍화점에서 먼저 떠나서 사행단이 도착하기 전 6일에 관소에 도착해서 여러 온돌방들을 수리한다. 관문 밖 좌우의 몇 백 호 문미의 판대기에 ‘천태 인삼국(天泰人蔘局)’이니 ‘광성 인삼국(廣盛人蔘局)’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 놓아 물건을 교역할 수 있도록 표시를 해두는데, 인삼이 우리나라 물건 중 제일 귀중하므로 인삼만 표시해도 다른 것들이 다 포함된다 여겼다.

인물 서유문(徐有聞)

1762(영조35) 스스로 행동을 나서서 하지는 않지만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그 말 속에 재미를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실제로 본 것처럼 남의 말을 듣고 상상하는 것을 매우 잘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마음속으로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하나 실제로는 마음이 약하고, 행동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유머러스한 풍자가 뛰어나 해학적인 재미를 주는 발견을 곧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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