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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형편없는 역관들 때문에 한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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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방물량을 감축해주는 이준문서 중에 기록된 방물의 종류가 세폐의 문서와 다르다고 하였다. 수역은 본래부터 문서의 두서를 몰랐기 때문에, 승문원의 관리 강우문이 따라가서 대답했다. 전례에 의거하여 그렇게 한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역관은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했고, 청나라 측 통관의 우리말 실력도 역관의 중국어 실력과 마찬가지로 분명하지 못해 강우문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없었다. 예부의 관리가 우리 의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썼지만, 끝내 대화가 막혀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수역은 뇌물을 많이 주면 무사하게 처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장관은 문서에 착오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수역을 불러 대답을 잘하지 못한 것을 꾸짖었다. 하지만 수역은 수긍하지 않았다. 정사가 서장관의 말을 듣고 다시 문서를 가져오라 해서 살펴보았는데, 정말 잘못된 곳이 없었다. 정사가 재차 수역을 불러 누누이 말씀을 하자 그제야 수역은 우리의 사정을 글로 써서 예부 관리에게 보여주자 하였다. 글을 써주자 수역은 그 글을 가지고 통관과 함께 다시 예부로 갔다. 상통사 장원익이 이 글의 내용대로 말하니, 예부 관리가 비로소 그 말이 옳다고 했다. 이 일은 수역이 통관의 말을 듣고서 대수롭지 않은 일을 대단한 것처럼 꾸민 다음, 이리저리 주선하고 임시방편으로 처리해서 자기의 공로처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수역과 통관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팔기도 하고, 한 마음이 되어 일을 작당한다. 그들이 작당하는 짓을 주변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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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남소관

남소관(南小館)은 조선 사신들이 쓰던 옥하관을 러시아인들이 차지하고 나가지 않아 별도로 설치한 관사이다. 옥하교의 남쪽이 있다 하여 남소관이라 한다. 우리 사신 일행이 사관하는 곳으로 청국 사람들은 사이관(四夷館)이라 말한다.

인물 김창업(金昌業)

1658(효종9)~ 1721(경종1)
행동력 있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표현 역시 직접적으로 간명하게 하는 편이다. 비교적 수식을 많이 하지 않고 담백하게 글을 쓰고, 사고 역시 그러하다. 한 가지를 보더라도 감정적 서술보다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하여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한다. 해서 말도 그리 많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도 돌려서 말하지 않고, 담담하게 지적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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