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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호랑이 우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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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원명원에서 남쪽으로 몇 리를 가면 그곳에 호랑이 우리가 있다. 처음 이곳에 이르자 지키는 사람이 핑계를 대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몇 자루의 부채를 주며 사정을 하니 그제야 허락을 했다. 층계로 올라가 동쪽 두 우리를 보니 범이 각각 쭈그리고 엎드려서 조심스럽게 똑바로 바라볼 뿐 별로 사람을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몇 사람과 손가락질을 하며 신기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는 천둥소리가 나며 담과 집이 온통 흔들렸다. 모두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호랑이가 사람들을 쳐다보며 으르렁 거렸다. 따라온 사람이 말하길 이 호랑이는 우리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길들이지를 못해 사람만 보면 이처럼 놀라고 화를 내는 통에 병이 날 염려가 있다고 하곤 도르래를 돌려 갑문을 끌어올렸다. 범은 갑분이 열리는 걸 보더니 훌쩍 뛰어 들어갔는데 번개와 같았다. 지키는 사람에게 간청해 다시 갑문을 열고 호랑이를 내오도록 했는데 호랑이는 궤 속에 숨어 엎드려 다시 나오지 않았다. 지키는 사람에게 돈을 한 꿰미를 주고 개고기를 문 앞에 던져주며 꼬여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한 사람이 못되게도 지팡이를 창틈으로 넣어 쿡쿡 찌르니 호랑이는 다시 큰 소리를 지르며 몸을 튕겼다. 궤 전체가 마구 흔들리며 금방 부서질 것만 같으므로 일행은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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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관상대

자금성 동남 모퉁이에 위치한 흠천감(欽天監) 앞에 보이는 높은 대(臺)를 관상대(觀象臺)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관상대에 오르는 일은 금지되었는데, 성을 의지해서 높이 쌓았으므로 궁궐을 엿볼 수 있고, 또 대부분의 의기(儀器)가 귀중한 보물들이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보면, 관상대 위에는 여러 가지 관측하는 기계들이 놓였는데, 멀리서 보면 큰 물레바퀴 같았다고 한다. 이 관측기구를 이용하여 일월(日月)ㆍ성신(星辰)과 풍운(風雲)ㆍ기색(氣色)의 변화하는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 관상대 아래에는 흠천감(欽天監)이 있어, 천체와 기후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 그 정당(正堂)에는 ‘관찰유근(觀察惟勤)’이라고 쓴 현판이 붙어 있다.
뜰에는 청동으로 만든 혼상(渾象)과 간의(簡儀) 등의 천문 관측기구가 놓여 있다. 크기는 모두 대여섯 뼘쯤 되고 네 둘레에는 돌난간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또한 강희(康熙) 연간에 만든 6의(儀)가 있는데, 천체의(天體儀), 적도의(赤道儀), 황도의(黃道儀), 지평경의(地平經儀), 지평위의(地平緯儀), 기한의(紀限儀)이다. 그 제도는 모두 서양(西洋)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정밀하고 교묘하다.
관상대 위에 진열한 기계들은 혼천의(渾天儀)와 선기옥형(璿璣玉衡) 등의 천문 기구이다. 박지원은 흠천관에서 본 기구들이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의 집에서 본 물건과 같았다고 했는데, 일찍이 정철조는 대나무를 깎아 천문 기구들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담헌 홍대용은 그의 『연기(燕記)』에서 이른 아침 관상대에 올라 여러 천문 기기들을 구경한 일과 관성대(觀星臺)에서 혼의(渾儀)와 망원경(望遠鏡) 등을 본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인물 홍대용(洪大容)

1731(영조7)~ 1783(정조 7)
문학적 상상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의 표현을 보면 무척 호방하고 대범한 기질이 엿보인다. 시와 서에 능하고, 넓고 깊은 시야를 지녔다. 총명하고 비범하다. 장난끼도 가득해서 이러저러한 장난들도 많이 치고 농담하기를 좋아한다. 흥미로운 것들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배움에 대한 열의도 강하고,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의 제도와 중국의 제도에 대해 비교하며 배울 것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것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북경(北京)에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 사귀어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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