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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회동관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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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길을 떠나기 전에 베풀어 주는 연회와 하사품을 받았다. 이날 시각을 알리는 북이 5번 울리는 것을 듣고 즉시 동장안문 밖으로 갔다. 그곳 문이 열리자마자 오문 밖으로 들어가 5번 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 바로 광록시(光祿寺)로 가서 하사해 준 술과 음식을 대접받았다. 접대가 끝나자 또 오문 밖으로 가서 1번 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그러나 서장관(書狀官)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좌시랑(左侍郞) 왕홍회(王弘誨)가 대궐에서 회동관(會同館)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회동관으로 갔으나 날이 저물어서야 시랑이 도착하였다. 1번 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궐패 아래에서 행하고 나아가 2번 절하는 예를 올렸다. 탁자에 진수성찬이 가득했다. 술을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다 술 7잔을 마시고 헤어졌다. 또 1번 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궐패 앞에서 행하고 시랑에게 2번 절하는 예를 올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이전에 간행된 『대명회전(大明會典)』 안에 조선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 문장을 고쳐 줄 것을 요구하는 등의 두루마리로 된 문서를 올리니 시랑이 이 문서를 받았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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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융복사

융복사(隆福寺)는 인수방(仁壽坊) 동쪽 사패루(四牌樓) 마시(馬市) 북쪽에 있는데, 명(明) 나라 경태(景泰) 때에 남문 안의 상봉전(翔鳳殿) 목석(木石)을 거두어다 지었고, 옹정(雍正) 때에 중수(重修)하여 라마승(喇僧)을 살도록 하였다. 절 가운데에서는 으레 한 달에 세 번씩 장을 여는데, 8일부터 시작해서 10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철시한다. 절 가운데에 전각이 첩첩이 들어박이고 불상이 화려하게 베풀어져 있었다. 전후 좌우엔 물건을 반드시 종류별로 구분해서 각각 벌여 놓았는데, 서책(書冊)은 동쪽에, 주옥(珠玉)은 서쪽에 벌여 놓았다.

인물 배삼익(裵三益)

1534(중종29)~ 1588(선조21)
평소 재미를 찾는데 익숙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를 기록한다. 별다른 감흥이나 재미요소를 첨가하기 보다는 나타난 사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 보다는 정해진 일자에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원리원칙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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