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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흑산도 사람이 표류하여 중국까지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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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흑산도 백성이 남해에 표류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곳에 도착하여 관사에 머물고 있는 사람 4명이 있었다. 그들은 신유년(1802) 겨울에 물고기를 사기 위해 곡물 조금을 배에 싣고 소흑산도에서 대흑산도로 갔다가 이듬해 정월 돌아오는 길에 바다 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유리국을 거쳐 연경 진공사를 따라 배를 출발시켰으나 10여 일 만에 또 바람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바닷물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던 끝에 어느 한 곳에 정박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 그들의 힘을 입어 집에서 쉴 수 있게 되고 쌀을 무역하면서 서로 돕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이 어딘지 물었더니 일록국이라고 하였다. 얼마후 길을 떠나 15일 만에 사분지에 닿았다. 또 석달을 가서 소주에 닿아 여기서부터는 배에서 내려 육지로 갔는데 관가에서 배풀어준 것이 아주 후했다. 10월 3일 소주에서 출발하여 12월 4일에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예부에서 입고 먹을 것을 제공해주었고 절도사가 올 때를 기다리게 했다고 한다. 천하를 두루 구경하고도 무식한 탓에 그것을 만분의 일도 기록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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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남소관

남소관(南小館)은 조선 사신들이 쓰던 옥하관을 러시아인들이 차지하고 나가지 않아 별도로 설치한 관사이다. 옥하교의 남쪽이 있다 하여 남소관이라 한다. 우리 사신 일행이 사관하는 곳으로 청국 사람들은 사이관(四夷館)이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