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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관상대를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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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관상대는 성 동남 모퉁이에 있다. 유송령이 말하길 황상의 금지구역으로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감관에게 뇌물을 주고 구경을 했다 발각이 되어 그 사람이 파면을 당한 일이 있어 그 뒤로 사람을 더욱 엄격히 금했다. 관상대는 성을 의지하고 있어 중금(中禁)을 엿볼 수가 있고, 또 의기들이 대부분 임금이 만든 것으로 사람을 금하는 것이 마땅하다. 대 위에서 한 사람이 굽어보기에 그에게 한번 보여달라고 했으나 그는 목을 그어보이며 올라오면 죄가 사형이라 말했다. 나는 말에서 내려 문지기를 보고 읍을 하며 들어가기를 청했다. 그는 원래 금지구역이라 들어올 수 없지만 지금은 이른 아침이라 상관이 오지 않았으니 잠시 들어오라고 했다. 대 위에는 강희제 이후 만든 것들로 육의가 있었는데, 천체의(天體儀)ㆍ적도의(赤道儀)ㆍ황도의(黃道儀)ㆍ지평경의(地平經儀)ㆍ지평위의(地平緯儀)ㆍ기한의(紀限儀) 등이었다. 좀 보고 있으니 문지기가 빨리 나가라고 하는 통에 정신없이 나와 버렸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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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관

연산관

연산관(連山關)은 분수령(分水嶺)을 넘어 30리를 가면 이르는 곳으로, 동팔참 구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호랑이를 만나고, 사냥꾼들이 수시로 노루를 잡아오던 곳이다. 명나라 때에는 겹문을 설치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조사했다고 하는데, 청나라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여기에서 요양이나 심양을 거치지 않고 산해관으로 직접 가는 길이 있었는데, 명나라 때부터 조선인에게 군사시설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하여 이용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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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인물 홍대용(洪大容)

1731(영조7)~ 1783(정조 7)
문학적 상상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의 표현을 보면 무척 호방하고 대범한 기질이 엿보인다. 시와 서에 능하고, 넓고 깊은 시야를 지녔다. 총명하고 비범하다. 장난끼도 가득해서 이러저러한 장난들도 많이 치고 농담하기를 좋아한다. 흥미로운 것들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배움에 대한 열의도 강하고,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의 제도와 중국의 제도에 대해 비교하며 배울 것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것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북경(北京)에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 사귀어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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