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에 대한 내용
다기
청대 일반 민가의 기명 가운데 자기에 대한 기록으로는 『연원직지(燕轅直指)』 「유관별록(留館別錄)」이 가장 자세하다.
일용하는 기명(器皿)은 오로지 자기(磁器)를 숭상하는데, 그림 그린 자기가 아니면 모두 새까만 자기이다. 백자(白磁)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 밖에 찻잔대ㆍ촛대ㆍ술잔ㆍ술병 같은 것은 혹 유기(鍮器)나 납기(鑞器)도 쓰지만 동기(銅器)나 석기(錫器)는 아주 드무니, 사가(私家)에서 쓰는 것을 금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관(寺觀)에서 쓰는 그릇은 모두 동(銅)과 석(錫)으로 되어 있다.
시중 가게에 있는 자기들은 진기한 것들이 많다. 높이가 몇 자씩이나 되는 술그릇은 무지개 빛깔이 은은히 일어나고 두 귀에 이무기와 용[螭龍]을 새겨 놓았으며, 또 큰 쇠고리를 꿰어 놓아 광채가 사뭇 눈부시다. 서양(西洋)의 기명(器皿)은 속은 동기(銅器)이고 겉은 자기로 발랐는데, 이야말로 자기 가운데의 교묘한 물건이다.
파손된 자기 또한 모두 버리지 않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실밥이 안으로 불거지지 않게 은사(銀絲)를 가지고 꿰맸는데, 완고하기가 성한 그릇 못지않으니, 그 손재주가 이처럼 교묘하다.
― 김경선, 『연원직지(燕轅直指)』 「유관별록(留館別錄)」―
먹
사행은 휘묵(徽墨)을 최고로 여겼다. 휘묵이란 중국 안휘성(安徽省)의 휘주부(徽州府)에서 생산되는 먹으로 품질이 좋기로 이름이 높았다. 당나라 때부터 만들어진 유서 깊은 이 먹은 원료에는 귀한 한약재와 향료가 들어가 색깔이 먹고 윤택할 뿐 아니라 향기도 짙어서 수백 년이 지나도 사용할 수 있었다. 1790년 북경에서 서호수(徐浩修)가 시랑(侍郞) 철보(鐵保)에게서 선물로 받은 먹과 군기대신 복장안(福長安)에게서 청심환(淸心丸)을 준 댓가로 받은 먹 모두 휘묵이었다.
벼루
중국 광동성(廣東省) 단계(端溪)에서 생산되는 돌로 만든 단연(端硯)을 최고로 여겼다. 단연은 먹이 빨리 갈리고, 먹물이 쉽게 마르거나 얼어붙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빛깔은 짙게 붉고 반질반질한 윤이 나며 두들기면 맑은 소리가 멀리 울리게 되고, 푸른빛과 누런빛으로 된 두 둘레와 동그란 점이 있는 것을 ‘구욕새의 눈’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암석(岩石)이라 하여 최상품으로 여겼다.
붓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에서 생산된 호필(湖筆)을 최고로 쳤다. 붓의 주원료는 짐승의 털과 대롱인데, 한 자루의 좋은 붓을 생산하려면 70여 차례의 공정을 거친다. 호필은 수많은 양털과 토끼털, 족제비 털에서 좋은 털로만 한 가닥 한 가닥 뽑아 합쳐 만든 우수한 재질의 붓이었다.
자제군관의 복식
군관들은 철릭을 입었다. 자제군관 역시 군관과 같은 옷을 입었다. 자제군관으로서 사행길을 갔던 김창업이 자신의 의복에 대해 기록해놓은 것이 비교적 자세한데, 김창업은 도강 전에는 흰색 도포를 입었다가, 도강할 때 군관들이 철릭으로 갈아입자 자신도 회색 창의로 갈아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의는 벼슬아치가 평소에 입던 옷으로 뒷솔기가 갈라져 있는 옷이다. 여기에 황갈색[沈香色] 띠를 매었고, 칼과 주머니를 안장에 걸었다. 철릭은 소매가 넓어 도포와 비슷한데, 양옆이 트여 있지 않고, 허리 아래로 주름이 잡혀 있다. 원래 윗옷과 치마를 따로 재단해 허리에서 치마주름을 잡아 연결시킨 외투로 군복의 일종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윗옷과 치마의 비율이 거의 같았는데 후기로 갈수록 치마가 두 배 이상 되었다. 소매도 크게 넓어져 결과적으로 도포와 비슷해졌다. 군복이기는 하더라도 관아의 아전, 양반관료에 딸린 겸인(傔人)들도 많이 입었다. 철릭과 함께 가슴에 띠를 둘렀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살펴보면 모든 양반들의 가슴에는 반드시 술띠가 둘러져 있다. 중인들도 가슴에 술띠를 둘렀지만, 대개 검은색이었다. 특히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 앞에서는 검은색을 띠어야했다.
청나라 일반남자의 복식
남자들의 의복은 부자거나 사치한 사람이 아니면 모두 굵은 베를 쓰며,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헝겊신을 신었다. 이 신은 모두 검은 비단으로 되어 있는데, 털을 싼 무명을 바닥에 깔아 놓아 부드럽고 질기다.
상하 의복에는 허리띠나 옷고름 같은 것이 없고 모두 홑단추를 썼다. 바지 역시 좁아서 겨우 다리통이 들어갈 정도인데, 허리 아래쪽은 꿰매지 않고 터놓아 마치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입는 개구멍바지와 같다. 다만 단추만으로 양쪽을 연결하고 있어 용변(用便) 볼 때 편하게 되어 있다. 버선 길이는 가죽신과 같은데 무릎 아래쪽에다 잡아매어 놓았다. 그래서 앉을 때는 반드시 의자나 탁자에 걸터앉고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잠시도 웅크리고 앉거나 꿇어앉지 않았다.
갖옷을 입을 때는 반드시 뒤를 터놓으니, 이는 말을 탈 때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종친(宗親)이나 각라(覺羅: 청나라의 황족)들은 양편을 한 자쯤 터놓아 스스로 구별이 되게 했다. 이 밖의 여러 가지 복식은 만(滿)∙한(漢)의 구별이 없다.
청대 탁자 의자
객당(客堂)에 벌여 놓은 의자와 탁자들은 모두 붉은빛을 띠고 결이 고운 무늬목으로 된 것을 쓴다. 의자는 자단(紫檀)을 소재로 제작한 남관모의(南官帽椅)로 등받이가 높은 것이 특징이며, 구유ㆍ보료 등 각색 짐승 털로 만든 담요를 깔기도 한다. 탁자의 다리는 네 개로 사각을 이루고, 높이가 세 자 이상이다. 연회를 열 때는 반드시 의자나 긴 의자에 둘러앉게 되는데, 이때 중앙에 탁자를 설치하여 술잔이나 그릇을 올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