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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17세기 사행록

연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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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정보에 대한 내용
사행록 정보 테이블
제목 연도기행(燕途紀行) 지은이 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 李㴭)
사행당시직급 정사(正使) 기록연대 효종7
기록언어

인평대군의 『연도기행(燕途紀行)』은 그의 11번째 중국 사행이었던 1656년의 진주사(進奏使) 사행 기록이다. 상중하 3권인데, 상권은 1656년 8월 3일 서울 출발에서 8월 21일 의주까지, 중권은 8월 22일 의주에서부터 9월 22일 북경까지, 하권은 9월 23일 북경에서 12월 16일 서울로 돌아오기까지의 견문을 자세하게 일기체로 기록하였다. 일반적인 연행록처럼 날마다의 날씨, 하루 동안의 이동 거리, 묵은 곳과 먹은 것, 청나라 사람들과 주고받은 대화, 명승 고적과 풍속 등에 대한 관찰이 담겨져 있다.
인평대군의 진주사행은 당시 효종의 군비 확충 정책이 청나라에게는 일종의 반청(反淸) 노선으로 비춰졌고, 이에 대해 해명하고 정책을 집행했던 관료들의 처벌을 완화시키고자 파견한 것이었다. 4개월 반 정도의 그렇게 길지 않은 여행이었는데, 인평대군은 무려 12일동안이나 천막을 치고 노숙을 했기에 감기와 안질, 열병에 시달렸다.
인평대군은 무려 11번의 사행 경험과 심양에서의 인질 생활을 통해 청나라 고위층과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사행의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반청 활동에 대한 변명은 잘 받아들여졌고, 영의정 이시백(李時白) 등 16명의 조신(朝臣)들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또한 현장조사를 통해 책임자를 문책하기 위해 파견하려던 칙사의 행차도 정지시킬 수 있었다.
『연도기행』에는 특히 요동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명청교체기의 많은 전쟁터와 그 전투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앞서 사행에서 본인이 직접 목격한 것도 있고, 현지인들에게 전해 들은 내용도 있다. 요동을 풍미하던 장수들 조대수(祖大壽), 홍승주(洪承疇), 원숭환(元崇煥), 오삼계(吳三桂)에 얽힌 일화와 이들의 처신에 대한 비분강개가 곡진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잡혀가서 청나라의 역관이나 군인으로 사는 조선인들의 삶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의주 출신의 김여휘(金汝輝)는 황제의 친위대에 속해 있으면서 접한 고급 정보를 인평대군의 숙소로 찾아와 전해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