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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 연희

연희 장소

연희 장소로서의 극장과 희대

연행록에 보이는 연희 장소 일반으로서의 극장은 희곡 상연과 관람을 위해 지은 전용 독립 건축물을, 희대는 극장 내부에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는 별도의 건축물을 이른다. 중국에는 객석을 설치하는 건축물 없이 사원(寺院) 등의 부속 건물로 건축하거나 길거리에 임시로 가설한 희대가 많다. 그러므로 극장이란 용어는 희대와 객석을 갖춘 건축물과 객석 건물이 없는 희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상연제도는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극장이 상연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극장과 희대는 조선에는 없는 건축물이라 연행록에는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명칭은 희루(戱樓)ㆍ희각(戱閣)ㆍ희장(戱場)ㆍ연희전(演戱殿)ㆍ연희각(演戱閣)ㆍ연희청(演戱廳)ㆍ관희전(觀戱殿)ㆍ관희전각(觀戱殿閣)ㆍ희대(戱臺)ㆍ희단(戱壇)ㆍ방단(方壇) 등 다양하다. 극장 건축의 형태에 따라 각(閣)ㆍ옥(屋)ㆍ전(殿)ㆍ루(樓)ㆍ대(臺)ㆍ청(廳) 등 다양한 명칭을 붙였고, 희막(戱幕)이라는 생소한 용어도 구사하였다. 극장과 무대 건축물이 따로 없었던 조선 사람으로서는 낯선 극장과 무대를 건축물의 형태에 따라 적절히 이름 붙인 것이다.

연행 노정 속 다양한 종류의 극장

중국에서는 송(宋) 나라부터 극장 건축이 나타나 청(淸) 나라에는 곳곳에 여러 형태의 건축물이 들어섰다. 극장의 다양한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북경과 연행 노정의 도처에 다양한 종류의 극장 건축물이 산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전통 극장은 그 세워진 장소에 따라 궁정극장(宮廷劇場)ㆍ도시극장(都市劇場)ㆍ향촌극장(鄕村劇場)ㆍ사원극장(寺院劇場)으로 분류할 수 있다. 궁정극장은 화려하고 장대하다. 희대는 3층으로 된 것도 있고, 황제와 비빈, 근신들을 위한 객석 건물을 갖추고 있었다. 상업극장은 도시의 번화가에 위치하여 실내 객석을 갖추었다. 향촌극장은 희대 건물만 촌락의 광장이나 노변에 세운 것이 일반적이다. 사원극장은 사묘(寺廟)의 부속 건물로 대개 정전(正殿)의 맞은편에 건설한 희대이다.

연희 전용 장소인 덕화원에서 춤추는 무희들

이화원의 대희대

연극을 상연하는 무대가 3층으로 구성된 대형 궁정극장은 청나라 때 4군데 있었다. 열하 피서산장 동궁(東宮)의 청음각(淸音閣)ㆍ북경 원명원(圓明園)ㆍ동락원(同樂園)의 청음각(淸音閣)과 수강궁(壽康宮)의 희대ㆍ자금성 영수궁(寧壽宮)의 창음각(暢音閣)ㆍ이화원(頤和園) 덕화원(德和園)의 대희대가 그것이다. 앞의 둘은 이미 사라졌고, 뒤의 둘은 지금도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다. 이밖에 단층 희대를 갖춘 소규모 극장이 자금성과 원명원에 여러 곳 있었다. 대형 궁정극장은 연극을 상연하는 희대, 관람하는 전각, 이 둘을 연결하는 양쪽 곁채로 구성된다. 1790년 건륭 황제의 80회 생일잔치에 참가한 서호수(徐浩修)는 7월 16일 열하 피서산장에서 연희를 관람하였다.

우리는 이어 두 시랑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두 문을 지나서, 연희전(演戱殿) 서서 협문(西序夾門) 밖에 있는 조방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조금 있다가 전상(殿上)에서 음악 소리가 났다. 시랑(侍郞) 철보는 우리에게 뒤따르라고 하더니 스스로 진하표(進賀表)를 받들고 서서 협문을 거쳐서 전정(殿庭)에 섰다. 전(殿)은 2층으로 가로로 7칸인데 아래층 정중앙에 있는 1칸이 어좌(御座)이다. 남쪽 창을 활짝 열었는데 좌우의 6칸은 조각한 창을 달고 유리(琉璃)로 막았다. 보니 비빈(妃嬪)이 창 안에서 내왕하고, 밖에는 공급(供給)하는 중관(中官)이 가득히 모여 있다.

전 동쪽과 서쪽에 각각 곁채[서(序)] 수십 칸이 있는데 이는 곧 연회를 배설할 곳이다. 전 남쪽에는 3층 각(閣)이 있는데, 맨 위층에는 ‘청음각(淸音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다음 층에는 ‘운산소호(雲山韶護)’, 아래층에는 ‘향협균천(響叶勻天)’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곧 음악을 연주하고 유희(遊戱)를 설행(設行)하는 곳이다. 전계(殿階) 좌우에는 분화(盆花)와 분송(盆松)을 벌여 놓았다. 계단 남쪽에는 고동(古銅) 화로를 안치하였는데, 침향(沈香) 연기가 오르고 있다.

― 서호수, 『연행기(燕行紀)』 제2권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1790년(정조 14)

열하 피서산장의 청음각

열하 피서산장 동궁의 청음각은 3층 희대(戱臺) 건축물이다. 서호수는 희대를 따로 희각(戱閣)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연희전’이라고 이름 붙인 건물은 정확히는 청음각 북쪽에 객석을 설치한 2층 건물로서 간대(看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북에 희대와 관람용 전각이 마주 서고, 그 동서에서 둘을 연결하는 건물이 곁채인 서(序)이다. 가운데 마당은 노천이다. 극장은 연희전과 희대, 동서의 곁채로 구성되며, 전체는 사각형을 이룬다. 이 극장은 1945년 실화로 소실되어 지금은 기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이 곳 극장의 구조는 이화원 극장과 같고 크기만 조금 작을 뿐이다. 서호수는 또 원명원의 극장을 묘사하면서 극장 전체를 설희전(設戱殿) 또는 관희전각(觀戱殿閣), 희대를 희각(戱閣)이라고 불렀다.

희원과 희관이라 불리는 상업 극장

송대부터 주루(酒樓)와 다관(茶館)에서 희곡 등 각종 공연예술을 연출하던 전통 위에서 청대의 대도시에는 건륭 연간부터 희원(戱園) 또는 희관(戱館)이라고 불리는 상업 극장이 활발하게 생긴다. 1828년(순조 28)에 북경을 여행한 무명씨의 『부연일기(赴燕日記)』에는 “성 안팎에 광대놀이 하는 누가 수백 곳이나 되며, 집 제도가 웅장하고 기구도 화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행사절의 일원은 이들 상업 극장에서 희곡을 관람하고 극장의 제도에 대해서도 기록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 가운데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와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은 연행사절 가운데 최초로 북경 시내의 극장을 방문한 조선 선비의 기록일 것이다. 홍대용은 1766년(영조 42) 1월 4일 북경의 정양문(正陽門) 밖에서 희곡을 관람하고, 극장의 제도와 관람 절차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홍대용의 기록은 중국의 그 어느 문헌보다도 극장의 규모와 상연제도를 잘 설명한다. 1,000명 가까운 관중이 극에 몰입하다 순간 환호하면 건물이 무너질 듯한 현장의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향촌과 사원의 희대

연행 노정 중에 향촌과 사원의 희대도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었다. 1712년(숙종 3)에 출발하여 이듬해 돌아온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향촌과 사원의 소규모 희대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김창업은 영원(寧遠)에서부터 마을과 사원에 희대가 많다고 하였다. 영원은 요녕성(遼寧省)의 최남단 지역이다. 명청대에는 부유한 개인의 저택과 향촌 각지에 희대 건축이 활발하였다. 강서성(江西省) 낙평시(樂平市)에는 명ㆍ청대에 건축된 희대가 217곳이나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김창업은 귀국길에 고려보를 지나면서 마을의 희대를 보았다. 편액이 걸린 누각(樓閣) 형태의 희대이다. 규모는 크지 않아도 단청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였는데, 서유문(徐有聞)은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는 이를 채각(彩閣)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희대는 대개 마을마다 있기 마련이며, 연극을 상연하는 무대 건축물만 있고 객석 건물은 따로 짓지 않는다. 이와 달리 판자와 갈대를 엮어 임시로 지은 희대도 있다. 김창업이 필옥(篳屋)이라고 부른 이 건축물은 땅바닥에서 2m 정도 올려서 폭과 깊이가 3~4m에 불과한 다락마루를 만들고 지붕과 벽은 갈대를 엮어 막는다. 이런 임시적인 무대를 초대(草臺)라고도 한다. 길가 광장에 지어 노천에 걸상과 탁자를 늘어놓고 앉아서 또는 주위에 둘러서서 연극을 구경한다.

붕과 희막

이밖에도 연행사절들이 목격한 중국의 극장에는 붕(棚)과 희막(戱幕)으로 불리는 형태가 있다. ‘붕’은 지상에 높다랗게 올린 다락마루 형태의 무대이고, ‘희막’은 영희(影戱: 그림자놀이)를 상연할 때 그림차가 비치는 천을 가리킨다. 그림자놀이의 희자는 이 막 안에서 인형을 놀리면서 노래와 대사를 하기 때문에 희막은 영희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호수의 『연행기(燕行記)』에는 채붕(彩棚)과 노대(露臺)라고 하는 연희 건축물이 기록되어 있다. ‘채붕’은 길거리에 설치한 임시무대이며, ‘노대’ 역시 노천에 설치한 간단한 무대이다. 명ㆍ청대 남방에서 활발히 건축된 개인 저택의 희대를 제외하면, 연행록에는 당시 중국에 존재한 거의 모든 형태의 희대와 극장 건축에 대한 견문이 들어 있다.

― 참고: 이창숙, 「연행록에 실린 중국희곡 관련 기사의 내용과 가치」, 『연행록연구총서』3, 학고방,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