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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 경로

사행 노정 형성

사행 노정은 조선 조정이나 사신들이 자유롭게 정하거나 바꿀 수 없었다. 중국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진공로(進貢路)’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정해놓은 대로 따라야 했다. 자연히 중국의 정치에 변동이 있으면 사행로도 변화하였다.

고려 1368년(공민왕 17) 고려는 사신을 배에 태워 남경(南京)으로 보냈다. 명나라 군대가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북경)을 포위공격한 다음 해였다. 당시 해로는 서해를 가로질러 산동반도까지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돌려 한참을 내려갔다가 양자강 하구로 들어가 거슬러올라 남경에 이르는 긴 노정이었다. 험난한 바닷길은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조난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고려는 명나라에 육로로 다닐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잔당을 핑계로 좀처럼 허락을 하지 않다가, 공양왕 1년(1389)이 되어서야 요양(遼陽)을 거쳐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요양에서 산해관까지는 역참(驛站)을 설치되어 있었다. 역참에는 숙소와 수비군이 있어 고려의 사신들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는 길은 버려진 땅으로, 역참이 없는 원나라 때의 옛길을 이용해야 했다.

역창참(驛昌站: 지금의 단동)→탕참(湯站)→개주참(開州站: 지금의 봉성)→사열참(斜烈站: 지금의 설례)→용봉참(龍鳳站)→연산참(連山站)→첨수참(甛水站)→두관참(頭館站)→요양

1640년(세조 6)에 이르자 이 지역에 북방 민족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그 지역에 새로운 길을 내고, 주요한 지점에 진지를 구축하여 병사들을 상주시켰다. 또한 요동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하여 마을을 이루게 하였다. 이후 1480년(성종 11)에는 명의 군사력은 봉황산(鳳凰山)까지 이르게 되었고, 다음해 6월에는 압록강변에 진강보(鎭江堡)가 설치되면서 조선의 의주(義州)와 마주보게 되었다.

마침내 구련성(九連城)이라고 부르던 진강보에서 시작하여 탕참(湯站)→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양까지 이르는 교통로가 확정되었다. 이 길을 요양 동쪽의 여덟 참이라는 뜻인 동팔참(東八站)이라고 불렀다.

구련성(九連城)이라고 부르던 진강보에서 시작하여 탕참(湯站)→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양

구련성(九連城)이라고 부르던 진강보에서 시작하여 탕참(湯站)→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