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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행 문화교류

예술

당괴(唐魁) 박제가와 북경의 예술

박제가 초상 청나라 양주팔괴의 한 사람인 나양봉이 그린 것으로 일본인 후지츠카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태평양 전쟁 때 소실되었다.

18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 사회는 점점 청조 문화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고 청나라 학문과 예술의 신경향은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어 종래의 고답적인 사상과 학문과 예술을 일변케 하는 기류를 형성하였다. 그 선봉에서 이 신사조를 누구보다 적극 받아들인 이가 박제가였다. 박제가는 세 차례 연경에 다녀오면서 지인도 많았지만 그 자신이 그들에게 아주 높게 평가되어, 건륭 연간의 대학자인 기윤은 나이 72세의 노인일 때 박제가가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귀양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걱정을 하며 시를 지어 인편에 귀양지인 종성이라는 변방까지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기윤에게 이처럼 대접받은 사람은 박제가 외엔 없었다고 한다. 또 박제가는 양주 팔괴의 한 사람인 나양봉과는 아주 친하여 서로 주고받은 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특히 박제가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까지 능하여 나빙(羅聘: 호 양봉 兩峯) 나양봉과 많은 그림을 주고받으며 서로 제화시를 교환했다. 박제가는 나양봉에게 초상화까지 그려 받았다. 박제가 초상. 청나라 양주팔괴의 한 사람인 나양봉이 그린 것으로 일본인 후지츠카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태평양 전쟁 때 소실되었다. 그 당시 나양봉은 강남을 떠나 북경 유리창의 관음사에 기거하며 불교에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교류가 잦았다

추사 김정희의 북경 학예이야기

박제가가 세 번째 연행에서 돌아왔을 때 추사는 16세였으니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스승으로부터 연경의 학예에 대하여 참으로 많고 많은 얘기를 듣고 또 들으며 동경에 동경을 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연경에 꼭 가리라 마음먹고 “하늘 아래엔 명사가 많다 하니 부럽기 그지없어라.”같은 시를 지었던 것이다. 추사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중국을 마침내 아버지를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1809년 10월, 추사 나이 24세, 아버지 유당 김노경은 44세 때 일이다.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연경으로 출발한 것은 1809년 10월 28일이었고, 동지 무렵에 연경에 도착하여 두 달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연경에서 귀국한 것은 이듬해 3월 어느 날이었으니 왕복 두 달에 연경에 체류한 기간이 두 달 남짓 되는 4개월여의 여정이었다.

추사가 연경에 가서 제일 먼저 만난 학예인은 조강(曹江)이었다. 스승 박제가와 절친했던 기윤ㆍ나양봉은 이미 타계하였고, 그 대신 박제가가 3차 연행 때 만나 깊은 정을 나누었던 당시 29세의 조강과 연락이 닿은 것 같다. 조강은 자를 옥수라 하고 호를 석계라 했으며 상해 사람으로 집안이 대단한 명문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시와 글씨로 명성을 얻어 1801년 박제가와 유득공이 연경에 갔을 때 20대의 젊은 나이로 시를 주고받고 교류했으며 헤어질 때는 예쁜 부채에 글씨를 써서 유득공에게 선물도 했다. 그리고 1807년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은 동지정사로 연경에 갔을 때 자신의 저서인『금릉거사문집(金陵居士文集)』의 서문을 조강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추사는 조강을 통하여 곧 서송(徐松)을 만났다. 서송은 과거에 급제한 수재로, 특히 지리학에 밝은 학자였다. 당시 서송은 전당문관에 근무하며『하남지(河南志)』같은 지리책을 편찬하였고 옹방강(翁方綱)ㆍ주야운(朱野 雲) 등과 자주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추사는 그를 통하여 북경의 여러 학예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담계(覃溪) 옹방강과 운대 완원(阮元)이 그들이다.

호를 완당으로 한 사연-완원과의 인연

청조 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였다는 평을 받고 있던 완원은 본래 강암 항주에 있었는데, 때마침 일이 있어 연경에 올라와 후실인 공씨 집안의 저택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였다. 완원은 일찍부터 조선 학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유득공이 박제가와 함께 연경에 갔을 때 완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유득공이 완원의「거제고」라는 글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완원은 추사를 만나보고는 그의 총명함과 박식함에 놀랐다. 한 예로 완원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지 않은 책 목록에서 원나라 주세걸의 『산학계몽(算學啓蒙)』이라는 책을 좀처럼 구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니, 추사는 그 책은 일찍이 조선에서도 간행되었으니 쉽게 구할 수 있다며 귀국하면 구해 보내주겠다고 했다. 추사는 귀국 후 완원에게 이 책을 보냈고, 이에 완원은 주세걸의 신간『사원옥감(四元玉鑑)』을 보내 사례했다.

실사구시와 평실정상의 자세로 학문을 닦고 경전을 연마하라는 완원의 가르침은 진실로 간곡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추사는 완원의 뛰어난 이론을 많이 필사하여 가지고 왔다. 귀국 후 그것을 외우고 또 외우며 평생 간직했다. 그리하여 완원은 마침내 추사에게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내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는데 30대로 들어서면 김정희의 호는 추사보다도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된다.

보소재와 보담재-김정희와 옹방강

옹방강은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이며 스스로 경학의 대가로 자부하는 연경학계의 원로였다. 일찍이『사고전서』편찬에 참여했고 국자감 사업을 비롯한 관직을 두루 거친 뒤 75세에 삼풍함을 하사받고 은퇴하여 보안사가 석묵서루에서 경전을 연마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옹방강은 고서화ㆍ탁본ㆍ전적 수집에 열성을 다하여 당시 이 분야의 최대의 수집가이자 최고의 감식가였다. 일찍이 박제가는 석물서루에서 직접 옹방강을 만난 적이 있고 귀국 후 종종 편지로 생각을 전하며 존경의 염을 보냈으니 추사는 스승의 가르침으로 옹방강의 높은 학예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1810년 정월 29일, 옹방강의 문인인 심암 이임송(李林松)의 안내를 받아 석물서루의 옹방강을 찾아갔다. 옹방강은 당시 78세였다. 그는 소동파를 좋아하여 서재 이름을 ‘소동파를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라는 뜻으로 보소재(寶蘇齋)라 했다. 추사는 이를 본받아 귀국 후 자신의 서재를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라고 해서 보담재(寶覃齋)라고 하였다. 옹방강은 추사와 마주앉아 필담을 하는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추사의 박식과 총명함에 놀라 마침내는 “해동에 아직도 이와 같은 영물이 있었는가”라며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고 칭찬했다. 이렇게 옹방강은 늙음을 잊고 추사는 젊음을 잊으며 마음과 마음이 통하였으니 후지츠카는 이 만남이야말로 한중 예술 교류사에서 역사적으로 특별히 기록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옹방강은 둘째 부인이 낳은 아들을 포함하여 모두 7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옹수배와 옹수곤을 불러 추사와 인사시키고 그에게 자신의 유명한 서고인 ‘석묵서루’를 두루 보여주게 하였다. 석묵서루는 희구 금석문과 진적으로 가득하여 그 수장품이 8만 점이라고 했다. 조선이라는 촌에서는 감히 볼 수 없는 원전을 여기에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추사는 석묵서루에서 옹방강이 해마다 이를 모시고 제사 지낸다는 3본의 소동파 초상을 보았다. 이로 인하여 조선 문인사회에서도 소동파가 귀양살이할 때 나막신 신고 있는 모습을 그린「동파입극도」가 크게 유행한다. 옹방강은 추사에게 많은 책과 글씨 그리고 귀중한 탁본을 선물로 주었다. 그 중에는 송나라 육방옹의 유명한 글씨인「서경」탁본도 있었다. 그리고 추사는 떠날 때 부친 김노경의 당호인 유당을 옹방강이 친필로 쓴 현판을 선물로 받았다. 석묵서루에서 꿈같이 보낸 이 행운의 진본ㆍ진적 배과은 이후 추사가 금석학과 고증학에 전념하는 큰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 학식의 정확한 토대가 되었다.

추사전별도

추사전별도 주학년이 그린 것으로 연경 법원사에서 열린 추사 송별회의 장면이다. 규격 소장처 미상

북경의 학예인들과 교류하며 견문과 학식을 넓혀가던 추사는 연경에서 옹방강ㆍ완원 같은 스승 이외에 이정원ㆍ서송ㆍ조강ㆍ주학년 등 많은 친구와 선배를 사귀었다. 이들은 모두 나양봉이나 기윤 같은 대가의 뒤를 이은 차세대의 빼어난 학예인들이다. 그 중 뛰어난 화가는 호를 야운 이라고 하는 주학년이다. 주학년은 추사를 무척 좋아하여 자신의 그림을 많이 선물하였다. 추사의 귀국 후에도 주학년은 인편에 적잖은 그림을 보내주었다. 또 자신이 추사를 그리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보내준 적도 있다. 또 소동파가 혜주에서 귀양살 때 나막신 신고 있는 모습을 그린 「동파입극도」도 보내주었다. 주학년의 그림 세계는 곧 추사와 그 제자들의 회화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제 추사는 귀국길에 오르게 됐다. 1810년 2월 1일, 추사의 송별연이 북경 법원사에서 열렸다. 노령의 옹방강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완원ㆍ이정원ㆍ조강ㆍ주학년ㆍ이임송 등이 모여 전별연을 베풀었다.

주학년은 송별연 장면을 즉석에서 스케치하고 거기에 참석자 이름을 모두 기록해 놓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주학년의 「추사전별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