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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대 중국 외교

대명관계
대명관계

대명관계

책봉조공의 관계 14세기 말 몽고족의 원나라를 대신하여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때 만들어진 책봉조공(冊封朝貢) 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세계 체재, 곧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완성하기 위해 사대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주변국들의 반발도 거셌는데, 특히 고려의 공민왕은 가장 적극적이어서 북방의 동녕부(東寧府)를 침공하였고, 명나라는 요동도사(遼東都事)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요동정벌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었다. 조선은 원나라를 버리고 친명(親明)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의 건국을 즉각 승인하였다. 조선은 ‘조선(朝鮮)’과 ‘화녕(和寧)’이라는 두 가지 국호를 올려 선정을 위촉하였고, ‘조선국왕(朝鮮國王)’을 새긴 새로운 옥새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는 황제가 왕을 봉하여 주고, 왕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전통적인 책봉조공(冊封朝貢) 관계를 수립하였다.

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을 가져왔던 사행 명나라는 요동 문제를 비롯한 현안이 남았기 때문에 명나라는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힘의 우위에 서고자 했다. 과도한 공물과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사신의 자질 문제를 들어 조선 사신의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강력한 항의를 접한 명나라는 사신을 1년에 3번 파견하는 1년 3사가 아니라 3년에 1번 파견하는 3년 1사를 권하였다. 사행 횟수를 줄여 사행을 통해 조선으로 누설되는 군사적 정보를 줄이고, 여진족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은 사행 제한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인정받는 문제 외에 사행이 갖는 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역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온 요동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문제와 조선이 작성한 표전문(表箋文)으로 벌어진 논란 등 여러 사건이 중첩되며 얽힌 관계는 대명관계에서 강경파였던 정도전(鄭道傳)이 물러나면서 일단락되었다. 세종 대를 지나 국내외가 안정되면서 대명관계도 요동을 중심으로 한 영토문제에서 문화와 교역을 중심으로 안착되었다. 조선은 서책과 약재, 활의 재료가 되는 수우각(水牛角)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문서를 매개로 한 외교활동 대명관계는 조선 사신이 공물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는 부경사행(赴京使行)과 칙사가 황제의 명을 조선에 직접 전달하는 명사출래(明使出來)를 통해 이루어졌다. 부경사행과 명사출래는 모두 문서를 매개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신하들끼리는 대화[通交]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문서를 전달하는 것 외에 별도의 교섭을 벌이는 것은 참람한 행위로 여겨 문책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행원은 문서 전달이라는 공적인 임무를 제외하고는 매우 제한적인 활동 범위를 허락받았다. 문서를 전달하고, 전달된 문서에 대한 확인과 답서에 대한 청구, 명나라 관원을 만나 외교적인 교섭을 벌이는 일, 사행원의 제반 일정에 관한 사항을 확인하는 일, 본국에서 매매하도록 명을 받은 물품을 매매하는 일 등은 모두 실무를 담당하는 역관이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