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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중국과 중국문화

중국 제도

중국의 성곽 제도

중국을 여행했던 연행사들은 중국의 성곽(城郭)과 시사(市肆) 등 건축 제도의 웅장함과 정묘함 그리고 그 화려함에 크게 놀라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에는 그 제도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중국의 성곽 제도는 네모반듯한 것이 규격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높이 수십 척, 두께 5, 6보(步) 가량 되는데, 그 위에 내외의 여장(女墻: 성 위에 만든 작은 담)을 만들었다. 요동의 각 진보(鎭堡)로부터 북경에 이르는 요충지에는 모두 성문 밖에 또 하나의 성을 쌓아 놓았는데, 이를 나성(羅城)이라고 한다. 이 성들은 모두 벽돌로 되어 있어서 매우 튼튼하다. 벽돌은 모두 같은 모양이어서 다듬고 운반하는 수고로움이 없어 여러 날을 걸리지 않고도 손쉽게 성이 완성된다.

북경성

북경성(北京城)은 둘레 40리, 남쪽 중성(重城)은 28리인데, 그 높이와 너비는 다른 성의 배나 된다. 통주성(通州城)은 둘레 8, 9리로 서쪽에 중성이 있고, 계주(薊州)와 영평부(永平府)의 성은 둘레가 모두 8, 9리인데 나성은 없다. 금주위성(錦州衛城)은 둘레 8리로 동쪽에 나성이 있고, 영원위(寧遠衛)에는 내성과 외성이 있는데 둘레 8리다. 산해관성(山海關城)은 둘레 7, 8리로 동, 서 나성(羅城)이 있다.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으로, 몽염(蒙恬)이 성을 쌓을 적에는 유관(楡關)에서 그쳤다고 한다. 홍무(洪武) 17년(1384)에 성을 다시 짓고 관을 확장하여 그 이름을 산해관으로 고쳤다. 관에서 남쪽으로 바다까지는 거리가 15~16리이나, 지형이 대체로 평평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으니, 그 웅장함이 천하에 뛰어난 곳이다. 관에는 내외의 성이 있고, 그 사이에는 다시 중성(中城)을 쌓아 그 구역을 막았다. 중성 가운데에 3층 처마로 된 큰 패루(牌樓)가 있고 사방으로 모두 문이 있는데, 동문과 서문 밖에는 다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 문에서 패루의 동서 양 문과 서성(西城) 문까지 합하면 칠중(七重)이나 되므로, 칠중관(七重關)이라고 한다. 옹성에는 문루[譙樓]가 없고 입구에 세 철판으로 문짝만 만들어 그 둥근 문지방[虹楣]에 ‘위진화이(威振華夷)’ 넉 자를 새겼다.

제1관은 4층 적루(敵樓)로 되었는데 홍미(虹楣)에 ‘산해관(山海關)’ 석 자를 새겼다. 제2관은 3층 적루로 되었는데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편액하였다. 홍대용은 그의 『연기(燕記)』에서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고 중국 대륙에 들어가 보고자 하는 소망을 시로 남긴 바 있다. 시장 점포는 북경이 제일 번화하고 심양ㆍ통주ㆍ산해관이 그 뒤를 잇는다. 북경 정양문(正陽門) 밖 유리창(琉璃廠)이 특히 번화하고 고루가(鼓樓街)가 그 다음으로 풍성하여 아로새긴 창틀이며 조각으로 된 문호(門戶)가 다 금빛 찬란하다. 모든 점포에는 각각 간판이 붙어 있다. 5, 6장(丈)은 됨직한 긴 나무의 네 면을 깎아 내고 거기다가 점포 안에 있는 물건의 이름들을 써 놓았다. 글자 색깔은 검은 것도 있고 붉은 것도 있으며 때로는 금으로 쓴 것도 있다. 또 처마에는 모두 표지(標識)를 달아 놓았는데 이것이 바람에 날리면 여러 가지 색깔이 휘황하게 빛난다. 저녁이 되어 뜯어 내릴 때 역시 쟁그렁거리는 소리가 난다.

중국의 패루

마을에는 모두 패루(牌樓)가 있다. 그 제도는 우리나라 영은문(迎恩門)같이 되었는데, 목재로 지은 것도 있고 혹은 석재로 된 것도 있다. 양식은 기둥이 둘, 마룻대가 하나이고 혹은 홑처마 혹은 겹처마로 지은 것도 있다.

조가 양패루(祖家兩牌樓)

조가 양패루(祖家兩牌樓)는 조씨 집의 패루(牌樓)로서, 조선 사신들이 일컫는 연행 기관(燕行奇觀) 중의 하나이다. 성안 네거리에 패루를 맞대어 세웠는데 서로의 거리가 100여 보(步)이다. 패루는 모두 처마와 문이 모두 셋이다. 그 앞에 돌사자[石獅子]가 앉아 있다. 그 나머지 들보ㆍ마룻대ㆍ서까래ㆍ창ㆍ난간ㆍ용마루 등도 모두가 백석(白石)으로서 투명하였다.

조대수(祖大壽)의 패루는 숭정(崇禎) 신미년(1631, 인조 9)에 건립되었는데, 높이가 10여 길이다. 맨 위층 안팎의 현판(懸板)에는 ‘옥음(玉音)’ 두 자를 새겼고, 제2층 전면에 ‘원훈초석(元勳初錫)’, 후면에 ‘등단준열(登壇駿烈)’이라 새겼다.

조대락(祖大樂)의 누각은 숭정 무인년(1638, 인조 16)에 건립되었는데, 높이는 조대수의 누각보다 조금 낮다. 최상층 안팎에 ‘옥음(玉音)’ 두 글자로 편액(扁額)하고, 제2층 앞뒤에 ‘사세원융소부(四世元戎少傅)’를 새겼으며, 제3층의 전면에 ‘확청지열(廓淸之烈)’, 후면에 ‘충정담지(忠貞膽智)’라고 새겼다. 조대락의 아버지는 조승훈(祖承訓)으로, 우리나라 임진왜란 당시에 요동 총병(遼東總兵)으로서 3천기(騎)를 거느리고 와서 제일 먼저 구원해 준 자이다. 그 동생이 조승교(祖承敎)로 조대수의 아버지이다. 이들 종형제는 4대째 장수로서 청인들이 관문 밖을 엿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를 믿어 누각을 세우고, 그 기이하고 새로움을 다투어 힘쓰다가 끝내 자신들은 포로가 되고 집안의 명성은 여지없이 떨어지고 오직 그 패루만이 남아 있다. 조선의 연행사들은 이 패루의 장대함에 놀라면서도 명나라의 멸망을 아쉬워하곤 하였다.

고북구패루

박지원의 명문장인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등장하는 고북구(古北口)는 연경(燕京)에서 열하(熱河)에 이르는 길목으로, 거용관(居庸關)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는 장성의 험한 요충지이다. 이 야출고북기의 현장에 자리 잡은 고북구 패루는 처마와 문이 모두 셋으로, 조가 패루의 양식과 흡사하나 그 규모와 화려함은 그보다 못하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옛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어, 당시 패루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사찰과 묘당

마을에는 반드시 사찰(寺刹)과 묘당(廟堂)이 있다. 요양ㆍ심양ㆍ산해관 등지에 가장 많고, 또 북경으로 가면 안팎에 있는 사관(寺觀)의 수가 인가에 비해 거의 3분의 1은 된다. 그러나 한 사찰에 승려의 수는 큰 절이라 해도 얼마 되지 않고 도사(道士)의 수는 더욱 드물다. 부처를 숭상하는 것이 예전과 다르고, 도승(度僧) 제도가 엄격하여 사찰마다 일정한 인원수가 있기 때문이다. 관왕묘(關王廟)에서는 반드시 부처를 받들고, 절에서는 또 관운장(關雲長)을 받든다. 이처럼 관운장과 부처를 하나로 높이 받들어 구별이 없다.

또한 민간에서는 낭랑묘(娘娘廟)ㆍ약왕묘(藥王廟)ㆍ문창묘(文昌廟) 등을 높이 받든다. ‘낭랑’은 생산(生産)을 주장하는 신(神)이고,‘약왕’은 신농(神農), 편작(扁鵲)과 같은 고대 의약(醫藥)의 비조이다. 문창성(文昌星)은 천하의 문장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별로, 선비들이 높여 존중하였다.

독락사

사찰 가운데 독락사(獨樂寺)는 그 제도와 규모가 커서 연행사들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옥전에서 계주성에 다다른 박지원은 독락사를 중점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서문 안에 있는 독락사는 와불을 모시고 있어 와불사(臥佛寺)로도 불린다. 2층으로 된 홍문(紅門) 안에 처마가 세 겹으로 된 정전(正殿)이 있다. 상방(上牓)은 ‘관음각(觀音閣)’이라 하고, 그 아래에 ‘태백(太白)’이란 두 글자가 쓰였는데, 이태백(李太白)의 글씨이다.

전 서쪽에 벽을 겹으로 하여 그 가운데 판자 사다리를 설치했는데, 북으로 향해 수십 계단을 오르다가 또 돌아서 남으로 수십 계단을 오르면 상루(上樓)에 이른다. 그 가운데에 난간을 빙 둘러서 설치했는데, 불신 (佛身)이 위로 솟아나와 있다. 어깨는 난간과 가지런하고 이마는 들보를 버티고 있으며, 머리 위 사방으로 빙 둘러서서 작은 부처 12개가 붙여져 있다. 아래에서 볼 적에는 그 길이를 알 수 없으나 상루에서 난간을 따라 돌아 오르면 그 형상이 다 보인다. 어깨 이상만도 2장(丈)쯤 되니, 그 전신의 길이를 추측할 수 있다. 독락사는 당(唐)나라 때 건축했으나 요(遼)나라 때에 중건해서 현재 요나라 3대 사원의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