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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 무역

무역 형식

사행길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사행 무역(使行貿易)은 중국으로 가는 사행의 여정 중에 이루어지는 무역을 말한다. 사행 무역의 형식은 공무역(公貿易)ㆍ사무역(私貿易)ㆍ밀무역(密貿易)이 병행되고 있었다. 공무역은 일반적으로 조공(朝貢)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취한 물화의 수수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른바 증여무역(贈與貿易)이라고 한다. 사무역은 좁게는 사행 역원(譯員)의 팔포 무역(八包貿易)과 상의원ㆍ내의원 및 각급 관아의 무역을 이르고, 넓게는 일반 상인들이 상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행에 따라가서 개인적으로 교역하는 경우를 이르기도 한다. 밀무역은 이 이외에 이루어지는 사상들의 불법적인 상거래를 지칭하는 것으로, 후시(後市)라고 한다. 이는 뒷장[後市]에서 나온 말로, 공무역인 개시(開市)에 대칭되는 용어이다.

증여무역형식으로 변화한 대중 무역 병자호란 이후 중국과의 무역 형식은 조공ㆍ회사라는 증여무역형식을 취하게 된다. 물화 보완의 형식으로서의 조공은 그 수량이 많아지면서 무역의 성격을 가미하게 된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끝난 다음부터 조선의 고종 11년까지 사절은 238년간에 999회로서 연평균 4.2회로 나타나고 있다. 이 기간에 청사(淸使)는 165회로서 연평균 약 1.4회 정도로 적은 것이다. 이것을 양국 간의 사신파견 빈도수를 보면 조선이 약 6배나 많이 파견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정기적인 사절의 파견부터 기타 사신의 파견에 이르기까지 많았던 결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당시의 우리 국력이 약한데 그 원인이 있다. 이렇게 사절의 파견 횟수가 많음은 그만큼 예물을 많이 가지고 가야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조선 측의 경제적인 손실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전기 대명관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이는 증여 무역의 내용적 특성인 것이다.

무역 상인으로 변모해 간 역관 조선 사회가 16세기 말 17세기 전반기에 왜란과 호란을 겪었음에도 신속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장기간의 무기류 생산을 통한 광공업의 발달과 대동법의 전국적인 확대 실시가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청일간의 중개무역이 활기를 띤 데 힘입고 있었다. 이 중개무역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청나라에 오갔던 부연사행(赴燕使行)이며, 이를 주도한 것이 부연역관(赴燕譯官)이었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인조 15년(1637)부터 조선의 개항(1876)까지 청나라로 간 사행은 총 673회에 이르는데, 이는 조선에게는 대청무역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17세기 대청무역에 참여하여 청ㆍ일간의 중개무역을 주도한 역관의 본래 임무는 사행 중 통역과 행중사(行中事)를 처리하는 일이다. 그러나 역관은 언어가 소통되는 점과 사행 중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 조선 정부의 역관제도 및 정책이 지닌 한계와 허점을 이용하여 무역 상인으로 변모해 갔다.

사행 역원에게 주어지던 인삼과 팔포무역 조선전기부터 사행 역원에게 은화를 가지고 가도록 하여 행중(行中)의 여비 및 무역 자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세종 때에 명에 대한 금(金)ㆍ은(銀) 세공(歲貢)이 면제되면서부터, 사행 역원이 은화를 가지고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 대신 정부가 사행역원 한 사람마다 인삼(人蔘) 10근씩을 지급하여 가지고 가도록 규정하였다. 비록 액수는 적었으나 사행 역원에게 일정액의 한도 내에서의 사무역(私貿易)을 허용한 것이다. 인조 6년(1628)에서 22년(1644)사이에 해당하는 명말(明末) 숭정(崇禎) 연간에 이르러 사행로가 험난해지면서 종래 한 사람 당 인삼 10근씩의 정액을 80근으로 증가 책정하였으며 그 인삼을 10근씩 팔포(八包; 여덟 꾸러미)에 나누어 싸게 하여 이를 팔포라 부르게 되었다. 곧 팔포무역(八包貿易)은 사행역원이 사사로이 마련한 인삼 80근을 사무역 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을 말한다.
부연역관들의 무역활동을 확장시킨 것은 관아 무역(官衙貿易)의 대행이었다. 서울의 각 군문이나 아문이 북경에서 수입해야 할 각종 물품은 재고량과 수요량을 고려하여 매년 동지행(冬至行)과 역행(曆行)의 부연역관에게 자금을 지급하여 수입하였다. 이를 별포무역(別包貿易)이라고도 한다. 역관들은 사행을 통한 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조선 후기 역관들은 신분타파를 주장하고 신문화의 수입과 의식의 개혁에 앞장서 근대화의 선구적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개시와 후시를 중심으로 한 민간무역 민간상인의 외국무역은 조선의 철저한 쇄국주의 정책으로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 주로 역관들에 의해 행해졌던 중국과의 무역은 임진왜란 중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강(中江) 지역의 개시(開市)가 이루어지면서 민간무역의 길이 열렸다. 개시는 두 나라의 사정에 따라 폐지된 적도 있지만 중강 이외에 회령ㆍ경원 등지에서도 열렸고, 참가하는 상인과 교역상품도 많아졌다. 그러나 개시는 두 나라 정부의 통제를 받는 등 그 제약이 심해, 공식적인 교역량을 넘는 밀무역(密貿易)이 성행하면서 이른바 후시무역(後市)가 이루어졌다. 즉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이 왕래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의주상인인 만상은 사행원, 특히 역관과 감독관 등과 결탁하여 몰래 사신 일행에 끼어 책문(柵門)에서 청국 상인인 요동의 차호(車戶)와 밀무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책문 후시(柵門後市)라고 하였는데, 책문에서의 무역은 사상(私商) 중에서도 만상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만상 후시(灣商後市)라고 불렸다.

대청무역의 최대 상인 만상 만상(灣商)은17세기 말 이후 대청 무역활동을 한 의주(義州)상인으로, 유만(柳灣)ㆍ만고(灣賈)라고도 한다. 책문후시를 통해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도시이자 중국의 관문인 의주가 대청무역의 중심도시가 되고, 만상은 이 대청무역의 최대 상인이 되었다. 그들은 금ㆍ은ㆍ인삼ㆍ우피 등을 청국 상인의 비단ㆍ당목ㆍ약재ㆍ기타 보석류와 거래하였다. 이러한 밀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은, 사행원이 개인비용을 스스로 충당할 만큼 경제력이 없었고, 사행의 실무 담당자인 역관의 경제적 대우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만상은 청나라와의 무역에 있어서 개성상인(開城商人)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만상이 중국시장에서 상품을 구입해 오면 국내 최대 규모의 상인인 개성상인은 이것을 국내에 팔고, 반대로 개성상인이 생산지에서 매점(買占)한 국내 물품의 중국 수출은 만상이 담당하는 무역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후시는 청국 상인들과의 부채 문제 등 부작용을 들어 금지되기도 하였다. 만상 후시는 1787년(정조 11) 혁파되기도 했으나, 1795년(정조 19) 재개되었다. 그러나 만상들은 개항 후 침투한 외래 자본에 밀려 해체의 길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