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 연희
연희 종류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조선 연행사들이 연행 기간 중에 보았던 연희이다. 이를 빈도수별로 나열해 보면 환희 13회, 창우희 10회, 연희 7회, 등희와 잡희가 각각 6회, 기악과 수희가 각각 4회, 완구희와 지포희가 각각 2회, 각희ㆍ근두희ㆍ상악ㆍ서양추천ㆍ장희ㆍ풍악ㆍ회자정희ㆍ희자습의가 모두 각각 1회씩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4백여 년간 조선 연행사들이 명ㆍ청에서 가장 많이 즐겨 보았던 연희는 환희였다.
- 각희(脚戱) 씨름놀이
- 등희(燈戱) 등불놀이
- 서양추천(西洋鞦韆) 서양 서커스
- 수희(獸戱) 동물놀이
- 잡희(雜戱) 가면희 곧 가면놀이와 환술
- 장희(場戱) 조선의 산대희(山臺戱),
곧 산대놀이 - 지포희(紙砲戱) 불꽃놀이
- 창우희(唱憂戱) 광대놀음, 희자놀음
- 환희(幻戱) 요술, 마술
- 회자정희(回子庭戱) 외줄타기 묘기
각희(脚戱) - 씨름놀이에 대한 내용
각희(脚戱) - 씨름놀이
김정중의 『연행록』에 보이는 원명원의 각희 (1회)
각희(脚戱)ㆍ서양추천(西洋?韆)ㆍ회자정희(回子庭戱)ㆍ등희(燈戱)
김정중은 1792년(정조 16) 1월 13일 원명원에서 각희, 서양추천, 회자정희와 등희 등 4장의 연희를 보게 된다.
오후에 다시 원명원에 나아가는데, 내가 김 첨정, 홍 예경과 함께 따라갔다. 두 문을 지나 100여 보를 가니, 2층 누각이 있는데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 편액하였다. 금옥으로 꾸미지도 않고 단청을 베풀지도 않아서, 자연스러워 딴 세상 같은 느낌이 있다. 누각 위 처마 밑에 양각등(羊角燈)을 달고, 섬돌 좌우에는 채색 포장을 했다. 포장 안에는 푸른 종이로 가산(假山)을 만들어, 그 위에 각각 채색한 등을 달았으며, 수십 보 사이에 단향(丹香)으로 엮어 울타리를 만들고 가운데에 정로(正路)를 텄는데, 길의 동서가 곧 청조(淸朝)의 관원 및 여러 사신이 늘어서는 곳이다. 그 앞에서 각희(脚?)를 먼저 하고, 또 서양추천(西洋?韆), 회자정희(回子庭?)를 하고, 또 갖가지 등희(燈?)를 베푸는데, 다 기관(奇觀)이다. 미시(未時)에 필성(?聲)이 세 번 나고 황제가 섬돌 위의 어탑(御榻)에 앉으니, 악사가 풍악을 울리고 여러 가지 놀이를 다투어 올린다.
― 김정중, 『연행록(燕行錄)』, 「기유록(奇遊錄)」, 임자년(1792, 정조 16) 1월
이 연희는 이날 북경의 원명원에서 청나라 왕과 더불어 관람을 한 것이다. 오후 1시경에 시작하였는데, 먼저 각희를 하고 이어서 서양추천을 하였다. 그런 후에 회자정희를 하였으며 등희로 마치는 것이다.
각희는 몽고ㆍ만주ㆍ중국[漢] 사람 중에서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자를 뽑아서 달마다 쌀과 고기를 주되, 힘이 800근을 드는 자가 아니면 그 선발에 참여하지 못한다. 각희를 할 때에는 옷을 다 벗고 작은 바지만으로 허리 밑을 가릴 뿐이다. 각각 짝이 있어 승부를 가리되, 이긴 자 한 사람이 홀로 몇 사람을 맞으니, 이는 우리나라의 각희와 다르다.
― 김정중, 『연행록(燕行錄)』, 「기유록(奇遊錄)」, 임자년(1792, 정조 16) 1월
각희, 곧 씨름 선수는 몽고족과 만주족과 한족에서 선발했는데, 선수를 몸무게나 키로 선발한 것이 아니라 8백 근 이상을 들어 올릴 수 있는 힘으로 선발하였다. 옷차림이나 경기 방식은 조선과 유사하였지만, 먼저 이긴 한 선수가 여타의 여러 선수를 상대로 계속 경기를 하는 것이 달랐다.
등희(燈戱) - 등불놀이에 대한 내용
등희(燈戱) - 등불놀이
김정중의 『연행록』에 기록된 등불놀이
날이 어두워서 등희(燈?)를 아울러 올린다. 5, 60명이 푸른 비단으로 상투를 묶고 녹색 웃옷에 노랑 바지를 입고 각각 겉에 ‘천하태평(天下太平)’이니 ‘만방함녕(萬邦咸寧)’ 따위의 글씨를 쓴 부채 같은 등 하나씩을 들고 한꺼번에 어탑(御榻) 앞에 나아가 고두(叩頭)하고 나서, 돌아서 뜰로 나가 한 기둥 탁자 위에 올라 등롱(燈籠)을 높이 들고 느린 소리로 선창하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나 만수무강(萬壽無彊)이라는 말로 황제에게 헌수(獻壽)하는 듯하다.
가운데 뜰에 긴 나무 하나를 세우고 그 위에 널빤지 하나를 설치하고, 널빤지 위에 채색 누다락을 꾸미고 널빤지 밑으로 길이 네 글자 남짓한 네 가닥의 붉은 끈을 드리워서, 네 가닥의 줄로 등롱 하나를 당겨 올리는데, 노랑 덮개로 덮은 것이 큰 북 같으며, 그 밑에 반 자 되는 화승(火繩)을 드리워서 불을 댕겼다. 불이 등롱 밑에 미치자, 등롱이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흰 연기가 공중에 차고 색종이가 어지러이 땅에 떨어지며, 갑자기 물건 하나가 등롱 안에서 나와 밑으로 늘어지는데 크고 작은 것들이 모두 다 등인데 이들이 한꺼번에 불이 밝아져 비치고 번쩍이는 것이 꼭 구슬을 이어 놓은 듯, 별을 꿰어 놓은 듯하여 기이하였다. 등의 수가 무려 천이나 만이 되는 듯한 데도 한꺼번에 불을 올리는 것은 사람의 재주로 할 수 없는 것인데 무슨 조화가 있어 지휘한 듯하다. 게다가 빛나고 어지러운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취하게 한다. 조금 있다가 그 불은 동시에 다 꺼져 버렸다. 또 화렴(火簾) 둘을 집 안으로 내려뜨린다. 발의 위쪽에 ‘만국래조(萬國來朝)’라는 네 글자를 쓰고 그 밖에 가득한 것은 모두 ‘희(喜)’ 자인데, 그 위에서 불이 타니, 발의 색이 마치 자수정과 같다. 그 발의 실이 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다가가서 보니 철사로 된 발이었다.
뜰의 동서에 자줏빛 딱총을 두어서 딱총 소리가 우르르 울리고 불이 흐르는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 것도 있고 땅으로 두세 길 내닫는 것도 있다. 광경이 갈수록 더욱 기이해지니, 대보름의 놀이로는 등불놀이를 첫째로 삼는다는 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니다. 등불놀이의 방법을 물으니, 이 고장 사람이 말하기를,
“등의 명칭은 만잔등(萬盞燈)이라 하는데, 가는 실을 써서 기계의 이빨로 서로 당기어 움직여서 한꺼번에 밝히고 꺼지게 됩니다.”
한다. 비로소 중국의 지혜롭고 교묘함이 변방 사람으로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았다.
― 김정중, 『연행록(燕行錄)』, 「기유록(奇遊錄)」, 임자년(1792, 정조 16) 1월
이날 김정중 일행이 원명원에서 본 4장의 연희 중 핵심이 되는 것은 이 등희이다. 등희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4장의 연희 시작 시간을 미시로 정한 것이며, 중국의 대보름 놀이 중에서 등희를 첫째로 꼽기 때문이다. 김정중이 본 등희의 등장인물은 60인이나 된다. 이 연희 4장의 전체 서막은 청나라 왕의 입장식이었으나, 등희의 서막은 청나라 왕의 천하관이라 할 수 있는 ‘천하태평’과 ‘만방함녕’을 등에 달아 올리면서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등불발의 앞에 ‘만국래조’라고 쓴 현수막을 달아 올리면서 수천 개의 등불을 점멸시킨다. 청조에 온 조공사들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서 줄불놀이가 계속되다가 딱총놀이로써 막을 내린다. 여기서 김정중은 만잔등(萬盞燈)의 여러 기법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서양추천(西洋鞦韆) - 서양 서커스에 대한 내용
서양추천(西洋鞦韆) - 서양 서커스
김정중의 『연행록』에 기록된 서양추천 (1회)
서양 추천은, 마당 좌우에 붉게 칠한 긴 기둥 넷을 세우고, 칸마다 나무로 가늘게 일(日) 자 모양으로 만들고, 기둥 위아래에 일자 나무를 만들고, 기둥 가운데에 ‘삼(三)’ 자로 짧은 서까래를 가로 꽂아서, 그 가운데의 서까래가 물레처럼 도는데, 머리 위에 붉은 상투를 틀고 몸에는 채색한 옷을 입었으되 붉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여 그 색이 같지 않았는데, 아이 열여섯이 한꺼번에 기둥에 올라 각각 일자 나무를 밟고 서서, 위에 있는 자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 있는 자는 아래에서 위로 빙글빙글 돌아, 붉고 푸른색이 어지러이 날아서 구름 사이를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게 마치 귀신이 조종하는 듯하다. 곁에 높은 기둥 둘을 세우고 흰 채색 비단으로 둘렀으며, 기둥 위에 높은 누각 둘을 세우고, 누각에 여덟 추녀가 있으며, 추녀 끝에 온갖 무늬의 붉은 실이 달렸다.
밑에는 널빤지 둘을 두었고 또 쌍상투에 채색 옷의 아이 여덟이 널빤지에 올라 밟아 돌리니 기둥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아이들은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뛰어 날며, 거꾸로 서는 자도 있고 손을 놓는 자도 있고 춤추는 자도 있어, 또한 하나의 기관(奇觀)이다.
― 김정중, 『연행록(燕行錄)』, 「기유록(奇遊錄)」, 임자년(1792, 정조 16) 1월
서양추천이라고 한 것은 서양 곡예, 곧 서커스이다. 서양 곡예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넓은 공간에 다가 여러 날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 그 내용 구성이나 등장 연예인 수도 중국의 전통 묘기보다 서양의 곡예가 더 큰 규모이다.
수희(獸戱) - 동물놀이에 대한 내용
수희(獸戱) - 동물놀이
김창업의 『연행일기』에 기록된 원숭이놀이와 개놀이
김창업의 『연행일기(燕行日記)』는 1712년(숙종 38) 동지사 겸 사은사 김창집(金昌集) 의 자제군관으로 북경을 여행한 감창업이 쓴 연행기록이다. 이 글에서 김창업은 12월 12일에 여양역(閭陽驛) 인근의 십삼산의 찰원에서 본 원숭이놀이 와 개놀이를 기록하였다.
어떤 사람 둘이 원숭이 한 마리씩을 데리고 왔다. 두 마리의 검은 개가 그 뒤를 따랐는데, 크기가 고양이만 하였다. 그들은 불러들여 재주를 부려 보라고 하였더니, 빨간 옷을 꺼내 원숭이에게 입히고 한 사람이 징을 치면서 소리를 질러 뭐라고 지껄이니, 두 마리의 원숭이가 각기 궤 속에서 나와 호인의 모자를 쓰고 사람처럼 일어서서 빙빙 돌았다. 조금 후에 또한번 고함을 지르니 두 원숭이가 다 모자를 벗고 궤 속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데, 하나는 갈래머리를 한 동자가 되고 하나는 점잖은 수염을 단 장자(長者)가 된다.
동자는 총채를 들었고, 장자는 구부러진 허리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빙글빙글 돌다가 얼마 뒤엔 다시 벗어 버리고 여자의 가면을 썼다. 한 여자는 시름겨운 얼굴에 수건을 들고 때때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이어 여자 가면을 벗고, 이번엔 갑옷을 입고 목마(木馬)에 앉아 병기를 잡고 찌르는 시늉을 하면서 빙빙 돌기를 두어 번 하고 그쳤는데, 그 동작은 징소리로 맞추었다. 이 놀이는 광대[戱子]를 모방하여 만든 듯한데, 어느 연본(演本 놀이의 대본)인지 알 수 없다. 호인들은 말하는 것도 마치 창(唱)하는 것과 같다.
― 김창업, 『연행일기(燕行日記)』 제2권,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
징소리로 시작과 끝을 알리고 장단을 맞추면서 두 사람이 데리고 온 두 마리의 원숭이가 먼저 동자와 장자의 가면을 쓰고 나와서 동자와 장자역을 한다. 이어서 원숭이는 여자 가면을 쓰고 나와 눈물겨운 여자의 역을 해낸다. 그리고 갑옷과 병기와 목마로 분장한 원숭이가 나와서 용맹스런 장수의 역을 한다. 이처럼 두 마리의 원숭이는 동자역ㆍ장자역ㆍ장수역을 맡아서 놀이를 진행한다. 등장인물이나 그 구성으로 볼 때, 이 원숭이놀이는 대본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잡희(雜戱) - 가면희 곧 가면놀이와 환술에 대한 내용
잡희(雜戱) - 가면희 곧 가면놀이와 환술
허봉의 『조천기』에 기록된 두 편의 잡희 (가면희와 환술)
최덕중의 『연행록』에 기록된 잡희
박사호의 『심전고』에 보이는 옥하관의 잡희
저자 미상의 『부연일기』에 보이는 북경의 광대놀이와 잡희 (이상 6회)
『부연일기』의 「주견제사(主見諸事)」에 있는 잡희는 다른 연행록에서는 보기 어려운 새로운 정보가 들어 있어 흥미롭다.
성문(城門)으로 통하는 거리에는 매양 잡희(雜戱)가 있어, 광대들이 서로 모여서 혹 창검(?劍)을 쓰기도 하고 혹은 탄환으로, 혹은 막대기로도 하는데 주먹질하고 발질하는 법과 손과 머리의 형세가 종종 씨름하는 장난을 하였다.
덕승문(德勝門) 안과 지안문(地安門) 밖에도 희막(?幕)이 있어서 장막으로 막아 칸을 만들어 놓았는데, 장막 속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듯 주문을 외는 듯,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며, 북을 치고 춤을 추는데, 구경하는 자들이 담처럼 둘러섰다. 말 위에서 잠깐 보니 칸막이를 한 곳이 있어 마치 유지창[油窓]이 비치는 듯한 가운데 어떤 물건의 전체가 창문에 붙어 있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며, 진짜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닌 것이 활동하여 돌면서 춤을 추는데, 긴 몸과 긴 팔뚝에 발가벗은 몸이 바로 흑색이며, 얼굴과 머리는 완연히 원숭이 따위였으니 혹시 창문에 비쳐서 원숭이를 희롱한 것일까? 아니면 따로 요술하는 그림자가 있는 것일까? 매우 분명하지 않았다.
― 저자 미상, 『부연일기(赴燕日記)』, 「주견제사(主見諸事)」
이 부연일기의 저자는 덕숭문과 안과 지안문 밖에서 희막(戱幕)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희막 안에는 유지창 같은 막에서 흑색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본 것은 그림자 놀이였다.
장희(場戱) - 조선의 산대희(山臺戱), 곧 산대놀이에 대한 내용
장희(場戱) - 조선의 산대희(山臺戱), 곧 산대놀이
김경선의 『연원직지』에 보이는 북경 정양문 근처의 장희 (1회)
장희기(場戱記)
장희란 대개 우리나라의 산대극[山棚戱]과 같다. 예부터 있었던 것이나 명나라 말기에 아주 성하였다. 매우 교묘하고 기이한 기예에 상하가 광탕(狂蕩)하며, 심지어 대내(大內)에 흘러들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고 하였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무릇 연희(演戱)하는 곳에는 반드시 희대(戱臺)가 있다. 그 재물을 내어 희대를 세운 자를 희주(戱主)라 한다. 그 창립하는 비용은 은이 7, 8만 냥이 들고, 또 해마다 수리한다. 희자(戱子 연극하는 자)를 불러 놀이를 베풀어 값을 받아서, 위로는 관세를 바치고 아래로 희자들의 삯을 주며, 그 나머지는 희주 자신이 가지니, 그 돈을 많이 거둠을 알 수 있다.
희대의 제도는 벽돌을 쌓아 넓은 집을 만든다. 높이는 6, 7길(丈)이 됨직하고 네 귀가 똑 고르며, 넓이는 5, 60칸 됨직한데 칸마다 긴 대들보가 있으며, 북쪽 벽 아래에다 9분의 1을 잘라서 간가(間架)를 만들어 비단 휘장으로 가렸다. 휘장 좌우쪽에는 문이 있고 문에는 발[簾子]을 드리웠는데 희구(戱具)를 간직하고 옷을 바꿔 입는 장소인 듯하다. 휘장 앞에는 남쪽을 향해 방단(方壇)을 쌓았는데 둘레가 7, 8칸은 될 만하니, 이는 연극하는 장소다.
방단 앞으로부터 남쪽 벽 아래까지 긴 책상을 줄줄이 배치하되, 앞의 것은 조금 낮고 뒤의 것은 점점 높게 하여 연극을 보는 자로 하여금 차례로 걸터앉아서 굽어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남, 서, 동쪽 세 벽에는 별도로 층루(層樓)를 만들었다. 1칸마다 각기 정해진 세(貰)가 있는데, 남쪽 벽 한가운데 맨 상루(上樓)의 세는 은 10냥이나 된다고 한다.
남쪽 벽 서쪽 구석에 다만 문 하나를 만들어 한 사람이 문을 지킨다. 관람자가 문에 이르면 먼저 요금을 받고서야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는데, 관람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요금이 오르내린다.
연극이 시작할 때에, 희주(戱主)가 관람자를 위해 차, 술, 과일, 음식 및 요강[溺器]을 각 관람자의 앞에 준비한다. 관람이 한창 재미있는 장면에 이르면 일제히 웃고 그쳐, 조금도 시끄럽게 떠드는 일이 없다. 그리고 비록 음설 희만(淫褻嬉慢)하는 중이라도 절제의 엄정함이 마치 범할 수 없는 군율과 같으니, 또한 중국 규율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풍속은 무릇 관광에 관계되는 일에 큰 갓, 넓은 옷에 몇 겹씩 빽빽이 늘어서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를 그치지 않고, 게다가 떡, 술, 나물 파는 소리가 그 중의 반을 차지한다. 나중에 온 자는 보고 들을 길이 없어 밀치고 눌러 마지않으며, 심지어는 돌을 던지고 서로 치기까지 하니, 여기에 비교하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지포희(紙砲戱) - 불꽃놀이에 대한 내용
지포희(紙砲戱) - 불꽃놀이
김경선의 『연원직지』에 보이는 원명원의 지포회 (이상 2회)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는 1832년(순조 32) 그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온 기록이다. 김경선은 1833년 1월 14일, 북경의 원명원(圓明園)에서 지포희를 보고 다음과 같은 「지포기(紙砲記)」를 쓴다.
지포(紙砲)는 지등(紙燈)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 유래는 대나무를 태워 폭음이 나게 한 데서 시작된 것인데, 잡귀를 물리치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곧 나희(儺?)에 가까운 것이다. 섣달 그믐날 밤부터 정월 보름날 밤까지 온 성의 인가가 밤마다 그것을 터뜨린다.
― 김경선, 『연원직지(燕轅直指)』 제5권, 「유관록(留館錄)」 하, 계사년(1833, 순조 33) 1월
김경선은 지포의 유래를 고찰하면서, 대나무를 태워 소리를 내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하였다. 지포놀이를 하는 까닭은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나희(儺戱)에 가까운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당시 청나라의 이 지포놀이는 섣달 그믐밤부터 정원 대보름 밤까지 왕실은 물론 장안의 모든 민가에서 행하여졌으며, 그 폐단에 대한 지적이 조선과 중국의 여러 문헌에 나타날 정도로 성행하였다.
그 제도는 종이에 풀칠을 하여 통(桶)을 만드는데 크기와 길이가 같지 않다. 그 안에 화약을 넣고 심지를 넣어서 불을 댕기면 불이 통에 붙자마자 갑자기 발화되는데 터지는 소리가 매우 웅장하다. 혹 2, 30자루를 일시에 터뜨리면 그 소리가 더욱 웅장해서 거의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것도 있고, 혹은 화염이 폭발되자마자 갖가지 전광(電光)이 공중을 향해 어지럽게 뿜어서 마치 불을 부채처럼 펴지는 것도 있고, 혹은 통 하나가 마디마디 터지면서 4, 5자루의 짤막한 포(砲)로 나눠져서 처음에는 한꺼번에 불을 뿜다가 나중에는 맹렬한 소리를 내고 사라지는 것도 있으며, 혹은 1개의 큰 통 속에 4, 5개의 작은 통이 들어 있어 큰 통이 터지면서 바로 작은 통이 튕겨 나가 마치 유성(流星)이나 화전(火箭)처럼 공중을 날다가 터지는 것도 있고, 솟구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마치 수십 가닥의 화사(火蛇)처럼 굽어 돌아 가시 같은 불꽃이 하늘에 넘쳐 재가 땅에 떨어져서 사람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할 것도 있다. 그 밖의 여러 포들은 다 기록할 수 없거니와, 이른바 유성포(流星砲), 반사포(盤蛇砲), 낙매화포(落梅花砲), 파대성포(破大城砲) 등이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 김경선, 『연원직지(燕轅直指)』 제5권, 「유관록(留館錄)」 하, 계사년(1833, 순조 33) 1월)
지포는 길이와 크기가 다른 종이통에 화약을 넣고 복선을 깔아서 불을 댕길 수 있게 만든다. 다양한 모양인 지포의 화염 빛과 폭발음의 조화가 밤하늘을 아름답고 황홀하게 수놓고 있다. 지포의 이름 또한 많아서 다 기록할 수는 없었으나, 유성포, 반사포, 낙매화포, 파대성포 등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 유성포는 지포의 화염이 유성처럼 흩어지는 것일 것이며, 반사포는 그 화염이 마치 뱀처럼 여러 가닥의 가는 갈래로 낮게 퍼지는 지포일 것이다. 낙매화포는 매화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처럼 많은 화염 덩어리들이 반짝이면서 떨어지는 지포일 것이고, 파대성포는 우람한 폭발음 소리를 내면서 터지는 지포일 것이다. 이러한 지포 놀이가 왕실과 장안의 모든 민가에서 두 주일간이나 지속되었다.
대개 한 통에 드는 비용은 혹 은자(銀子) 4, 5냥에 이르는데 한 집에서 하룻밤 태우는 것 또한 100자루에 가까운 많은 양이고 보면, 높은 벼슬아치 집에서의 사치스러움을 다투는 것이나, 궁궐 안에서 거창하게 설시하는 것은 더욱 미루어 알 만하다. 이 역시 그만두어야 할 일인데, 왜 그만두지 못한 것일까? 또 화약은 병사(兵事)에 이로운 기구인데 절도 없이 마구 없애기를 이처럼 심하게 하니, 나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 김경선, 『연원직지(燕轅直指)』 제5권, 「유관록(留館錄)」 하, 계사년(1833, 순조 33) 1월)
지포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당시 은(銀) 4~5냥이 들었다. 한 집에서는 하룻밤에 지포 일백 개 정도를 터뜨린다. 높은 관직에 올라 있는 이들의 집이나 왕실에서 더 큰 규모에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이에 김경선은 군사용으로 써야 할 많은 화약이 무절제하게 낭비되고 있는 현상을 개탄하면서 당시 청나라의 지포놀이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 연행사들이 명과 청 왕조의 연희를 보면서 놀라움과 충격을 받는다. 조선 연행사들이 보고 기록한 다양한 연희는 한ㆍ중 문화 교류의 새로운 모습이면서, 조선의 연희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정치적인 관계를 고려하고 사절의 의례를 엄격히 지켜야했던 연경의 조선인들은 이처럼 다양한 연희를 구경하면서, 청대 사회의 완숙한 문화를 체험하고, 한ㆍ중 문화교류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창우희(唱憂戱) - 광대놀음, 희자놀음에 대한 내용
창우희(唱憂戱) - 광대놀음, 희자놀음
김정중의 『연행록』에 보이는 유리창의 광대놀이 3종
김정중의 『연행록(燕行錄)』은 조선 정조 15년 연행사절에 김정중이 벼슬이 없는 선비로 참여하면서 쓴 기록이다. 김정중은 1792년(정조 16) 1월 8일 북경의 유리창에서 3가지의 창우희를 보게 된다.
아침을 먹은 뒤에 윤 봉사, 홍 예경과 함께 유리창의 광대를 보러 갔다. 구경꾼이 산처럼 모이는데, 마당 가운데에 포장을 치고 몇 사람이 포장 밖에 서서 구경 값을 받는다. 돈을 내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게 하므로, 내가 주머니에서 5푼 동전을 찾아서 주니 그 사람이 곧 나를 맞이하여 높게 걸쳐 놓은 의자에 앉히는데, 때마침 광대들이 각각 제 재주를 부린다.
길이 한 자 남짓하고 둘레도 그만한 둥근 항아리를 든 자가 있다. 처음에는 왼손으로 그것을 던져서 오른손으로 받곤 하다가, 손이 점점 익숙해지자 던져서 공중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에 문득 주먹 끝으로 받는데 이와 같이 서너 번 하고는, 또 두 손가락으로 받는데 항아리 밑에 손가락 끝을 세웠으되 흔들리지도 기울지도 않는다. 혹 왼쪽 손바닥으로 굴려서 팔로 해서 가슴에 가고, 오른쪽 손바닥에 옮기며, 곁에 한 사람이 있다가 그 팔을 쳐서 그것을 떨어뜨리면 땅에 떨어지기 전에 곧 놀라는 척하고 잡아온다. 그 몸을 돌리고 물건을 굴리는 것이 마치 조화를 부리는 듯하다.
― 김정중, 『연행록(燕行錄)』, 「기유록(奇遊錄)」, 임자년(1792, 정조 16) 1월
이 광대놀이는 북경의 유리창에 있는 한 마당에다 포장을 치고 그 안에 무대를 만들었으며, 포장 밖에서는 입장료를 받고 관객들을 입장시키고 있다. 관람객은 많이 모여들고 입장료를 주고 시렁에 올라가서 관람을 한 것을 보면 흥행에 아주 성공을 하고 있다. 이 가설무대에서 공연한 광대놀이는 둥근 항아리를 손과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던지고 받으면서 그 것을 자유자재로 이동시키는 묘기다.
환희(幻戱) - 요술, 마술에 대한 내용
환희(幻戱) - 요술, 마술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묘사된 20종 환술
김경선의 『연원직지』에 기록된 옥하관의 33종 환술
환희(幻戱)
연행록에서 환희는 연행사들이 가장 선호한 볼거리였다. 환희의 구성을 규모별로 제시하여 보면 33종의 환희(1회), 20종의 환희(1회), 11종의 환희(2회), 5종의 환희(1회)로 나타난다. 가장 큰 규모의 환희는 김경선이 본 33종의 환희이고, 그 다음은 박지원이 본 20종의 환희다. 가장 보편적으로 구성된 환희는 11종과 9종의 환희였으며, 단종의 환희를 볼 때도 있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1780년(정조 4) 청나라 고종(高宗)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한 연행사절의 일원으로 연경에 간 박지원의 글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환희기(幻戱記)」에서, 그가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에서 홍려시 소경(鴻?寺少卿) 조광련(趙光連)과 같이 구경한 20가지의 환희를 기록하였다.
요술쟁이가 대야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정하게 닦은 뒤에 얼굴을 정제하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바닥을 치고 이리저리 뒤집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 뒤에, 왼손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은 환약을 만지고 이나 벼룩을 잡듯이 마주 비비니, 갑자기 가느다란 물건이 생겨 겨우 좁쌀낱만 했다. 연거푸 이것을 비비니 점점 커져서 녹두알만 해지고 차차 앵두알만 하다가 다시 빈랑(檳?)만 하더니 차츰 달걀만 해졌다. 두 손바닥으로 재빨리 비벼 굴리니 둥근 것이 더 커져서 노랗고 흰 것이 거위알만 해졌다. 조금 있더니 이번에는 차차로 커지지 않고 별안간 수박만 하게 된다. 요술쟁이는 두 무릎을 꿇고 가슴을 벌리고 더 빨리 비벼 장고를 끌어안은 듯 팔뚝이 아플 만하여 그치더니, 이내 탁자 위에 놓는데 그 몸뚱이는 둥글고 빛은 샛노랗고, 크기는 동이만 한 것이 다섯 말 들이는 되어 보이며, 무게는 들 수가 없고 단단하여 깨뜨릴 수가 없어 돌도 아니요 쇠도 아니며, 나무도 아니요 가죽도 아니며 흙도 아니요, 둥근 것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냄새도 없고 향기도 없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만치 제공(帝工) 같았다. 요술쟁이는 천천히 일어나 손뼉을 치면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다시 그 물건을 만지는데, 부드럽게 굴리고 가만히 쓰다듬으니 물건은 부드러워지고, 손을 슬며시 대니 가볍기가 물거품 같아 점점 줄어들고 사라져서, 잠깐 사이에 다시 손바닥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비비다가 한 번 튀기니 즉시 사라져 버린다.
― 박지원, 『열하일기』, 「환희기(幻戱記)」
이 환희는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을 부벼 좁쌀만한 크기의 물건을 만들어서 그것을 계속 부벼 점점 더 큰 물건으로 만들어 마침내 물동이만 한 크기로 만들었다가 그것을 다시 부벼서 점점 작아지게 하여 좁쌀만한 크기로 만들었다가 마침내 없애버리는 것이다.
김경선이 쓴 『연원직지(燕轅直指)』에 있는 「환술기(幻術記)」는 연행록에 보이는 환희 기록 가운데 가장 상세하다. 김경선은 1832년(순조 32) 12월 19일에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도착하여 무료하게 보내던 중, 12월 28일 옥하관으로 환희하는 사람을 불러 환희를 구경한다.
요술쟁이는 도합 세 사람이었다. 용모는 용렬하고 옷과 모자가 남루하니, 대개 배우는 천품(賤品)이다. 그들은 요술 기구를 짊어졌다. 한 사람은 그 상자를 풀어서 그것을 지키고, 수행자 한 사람은 붉은 칠을 한 높은 탁자를 뜰 가운데 설치하였다. 탁자 위에 붉은 담요를 먼저 깔고 담요 위에는 또 검은 베로 만든 작은 보자기를 깐 다음, 손으로 문질러 펴서 담요와 보자기가 탁자 면에 편평히 붙게 하였다. 그런 다음, 요술쟁이는 홑적삼과 홑바지만을 입고 모자를 벗어서 땅에 두고는, 탁자 앞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서 손바닥을 계속 쳤다. 대개 그 말은 탁자와 담요가 깨끗하여 다른 물건이 없다는 것과 기술의 묘한 점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었다.
―『연원직지(燕轅直指)』 제3권, 「유관록(留館錄)」 상
환희는 세 사람이 하는데, 모두 용모가 용렬하고 복식은 남루하다. 그들은 각기 맡은 역할을 분담하여 환희대를 가설하고 환희 도구를 챙긴다. 옥하관의 뜰 가운데 높고 붉은 탁자를 놓고, 그 탁자 위에 담요를 깔고, 그 담요 위에 보자기를 깐 다음 담요와 보자기를 탁자에 편평히 붙게 하여 환희 무대를 설치한다. 환술쟁이는 홑적삼과 홑바지만 입고 모자를 벗어 바닥에 놓은 다음 가설된 탁자 앞에 서서 자기의 몸이나 탁자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확인시킨다.
대개 그 요술은, 드러내기는 해도 숨기지는 못하고, 어떤 것이 오게끔 요술을 부릴 수는 있어도, 어떤 것이 가게끔 요술을 부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장차 그 요술을 부리려면 반드시 미리 밖에 장치를 하여 남의 힘을 빌지 않고도 요술을 부려서 오게 한다. 하지만, 그가 도로 나갈 적에는 반드시 수종자를 따르게 하여 능히 그 형상을 숨기지는 못하니, 요술에 통색(通塞)의 이치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연원직지(燕轅直指)』 제3권, 「유관록(留館錄)」 상
이것은 환희에 관한 저자의 총평이라 할 수 있다. 환희는 드러낼 수는 있어도 숨길 수는 없는 것이며, 오게 하는 환의는 할 수 있어도 가게 하는 환희는 없다는 것이다. 작자는 이 환희를 본 다음에 백운관(白雲觀)에서 정식으로 가설된 환희 무대에서 수많은 환술꾼들이 더 탁월한 솜씨로 진행하는 환희를 보았는데, 이때 비로소 관소에서 본 환희가 흉내만 내는 약식 환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환희에 더 큰 관심을 가지면서 환희사[幻史]를 짓는다고 하였다.
회자정희(回子庭戱) - 외줄타기 묘기에 대한 내용
회자정희(回子庭戱) - 외줄타기 묘기
김정중의 『연행록』에 기록된 회자정희 (1회)
회자 정희는, 두 기둥에 홑 밧줄을 걸고 몸을 날려 기둥에 올라 밧줄을 밟고 평지처럼 오가는 것이 우리나라 광대와 다름없다. 혹 밧줄에 앉아서 다리를 내려뜨렸다가 몸을 일으켜 밧줄에 오르며, 보는 사람은 기특한 재주를 칭찬하여 외치는데, 다 우리나라 광대가 하기 어렵게 여기는 것이었다.
― 김정중, 『연행록(燕行錄)』, 「기유록(奇遊錄)」, 임자년(1792, 정조 16) 1월
회자정희라는 것은 외줄타기의 묘기인데, 회족들이 관아나 대가의 뜰에다 무대를 가설하고 공연한 것이어서 회자정희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외줄 타는 광대놀이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