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 경로
노정 속 주요도시
조선 사신들이 사행 노정에서 꼭 들렀던 주요 도시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행을 가던 사신들은 15세기 들면서 육로로 정착된 노정을 갔다. 사행 노정은 의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넌 후 책문에서 대대적인 통관 절차를 거친다. 그 후 구련성에서 호랑이를 쫓는 불을 피워놓고 한뎃잠을 자는 노숙으로 시작하였다. 책문에서부터 북경까지는 모두 30여개의 참(站)이 있었는데, 각 참마다 찰원(察院)을 설치하여 조선사신이 머물게 하였다. 심양에서 광녕, 산해관을 거쳐 풍윤현 근처의 고려보를 지나 계주를 지나 북경으로 들어갔다. 혹은 박지원처럼 황제가 휴가를 가 있는 청나라의 여름궁전 피서산장이 있는 열하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의주(義州) 의주는 조선의 대표적인 국경도시로 중국으로 오가는 길의 관문(關門)이었다. 한양을 출발한 사행은 의주에서 열흘 정도 머물렀다. 그 동안 삼사(三使)는 중국 황실에 보내는 문서를 마지막으로 검토했다. 또한 수행원들이 모이기를 기다렸고, 각지에서 보낸 봉물을 확인하고 포장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은 먼길을 떠나는 사행을 위로하기 위해 백일원(百一院)에서 주연을 베풀고 기녀들의 마상무예를 관람하게 했다. 국경을 넘을 준비가 끝나면 나루터로 나갔다. 의주 부윤은 강을 건너는 말과 사람의 숫자를 장부와 맞춰보고, 수행원들의 짐과 몸을 수색하였다. 무역 금지 물품이나 허용량 이상이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업이 완료되면 삼사는 도강(渡江)을 알리는 장계를 써서 조정에 보낸 뒤, 작별의 술을 마시고 배에 올라 강을 건넜다.
구련성(九連城) 구련성은 삼강을 건넌 사행이 중국에서의 첫 밤을 보내는 곳이다. 아홉 개의 성이 잇달아 있어‘구련(九連)’이라고 한다.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이라는 전설도 있고, 금나라 장수가 고려와 싸우기 위해 쌓았다는 전설도 있다. 명나라 때는 진강부(鎭江府)를 설치하여 이곳에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청나라에 들어서는 봉금정책을 실시하여 조선과의 국경지대에 건물을 짓거나 농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인가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 사신들은 이곳에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보냈다.
탕참(湯站) 탕참은 오룡배와 책문 사이에 있고, 탕산성(湯山城)이 있던 곳이다. 탕산성은 명나라 때 벽돌로 성을 쌓고 지휘사(指揮使)를 두었던 곳인데, 청나라에 이르러 봉금정책으로 버려지면서 많이 허물어졌다. 조선인들은 사행 길에 만리장성의 오래 묵은 회[萬年灰]를 구해오게 하였는데, 사행단은 이곳의 회를 긁어가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봉황성 (鳳凰城) 봉황산(鳳凰山) 서쪽에 있는 성으로 지금의 봉성시(鳳城市)이다. 조선 쪽의 국경을 책임지는 도시로, 봉황성장이 주관하였다. 명나라의 지리서 『일통지(一統志)』에 따르면 발해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요나라 때에는 개주진국군(開州鎭國軍)이 설치되었고,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소속되었다. 명나라 때에 벽돌로 튼튼하게 성을 쌓았고,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조선과의 국경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현지인들은 조선을 숭상하여 사행에 따라온 의주 사람을 이웃 친지처럼 대하였다. 박지원이 여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벽돌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설류참(薛劉站) 설류참은 사행이 봉성을 떠나 점심을 먹는 곳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부하 장수였던 설인귀(薛仁貴)와 유인원(劉仁願)이 군사를 주둔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설리참(雪裡站)이라고도 했다. 이는 민간의 이름이고, 공식적인 명칭은 진동보(鎭東堡)이다. 명나라가 동쪽 변방을 대비하게 위해 세운 군사 기지였다. 조선 사람들은 북경을 출발하여 여기에 오면 비로소 소나무가 있다고 하여 송참(松站), 또는 솔참이라고 불렀다.
통원보(通遠堡) 통원보는 명나라 때 진이보(鎭夷堡)라고 불렸던 곳이다. 후금(後金)이 청(淸)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황제로 즉위하던 해에 춘신사(春信使)로 갔던 나덕헌이 돌아오면서 국서(國書)를 버려두고 온 곳으로 유명했다. 엄연히 명나라와 사대의 관계에 있던 상황에서 ‘청나라 황제’를 용납할 수 없었기에 나덕헌은 조선으로 국서를 가져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일은 병자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박지원은 장마로 길이 막혀 통원보에서 여러 날 묵었다. 그는 벽돌 가마에서 관찰하면서 벽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온돌보다 난방이 뛰어난 캉[亢]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관(連山關) 분수령(分水嶺)을 넘어 30리를 가면 이르는 곳으로, 동팔참 구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호랑이를 만나고, 사냥꾼들이 수시로 노루를 잡아오던 곳이다. 명나라 때에는 겹문을 설치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조사했다고 하는데, 청나라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여기에서 요양이나 심양을 거치지 않고 산해관으로 직접 가는 길이 있었는데, 명나라 때부터 조선인에게 군사시설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하여 이용이 금지되었다.
요양(遼陽) 요양은 한나라 때에는 양평요양(襄平遼陽)으로 불리다가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요동성(遼東城)이 되었고, 금나라 때에는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원나라에 이르러 요양현(遼陽縣)이 되었다. 고구려 이후 고려 공민왕(1330 ~ 1374)의 요동 정벌 시기에 잠시 고려의 판도에 들어왔다가 다시 중국 땅이 되었다. 요양은 중국 사행 노정의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명나라 때에는 요양성 밖의 조선관(朝鮮館: 懷遠館)에서 하루밤을 묵고, 바로 서쪽으로 꺾어져 주필산(駐蹕山)과 해주위(海州衛)를 거쳐 곧장 광녕으로 갔다. 청나라가 되어서는 요양 시내에 들어서지 않고 태자하를 건너 영수사(映水寺)에서 묵고 심양으로 갔다. 요양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는 서문 밖에 있던 백탑(白塔)이었다. 8각에 13층, 높이는 70.5m인 백탑은 요동벌의 등대와 같은 존재였다.
심양(瀋陽) 심양을 요나라와 금나라는 심주(瀋州)라고 하였다. 원나라에 이르러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 하여, 심양(瀋陽)이라고 불렀다. 1634년에 후금의 지배층들이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뜻으로 ‘천권성경(天眷盛京)’으로 고쳐 불렀고, 1657년에 “하늘의 뜻을 받들어 운수를 잇다[奉天承運]”는 뜻을 가져와 심양성 안에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봉천이란 이름은 나중에 일제가 세운 만주국 시절에 잠깐 쓰였을뿐, 예나 지금이나 심양으로 불렸다. 청나라 때의 심양성은 또 하나의 수도라고 부르며, 모든 제도와 규모를 북경의 그것에 맞추었다. 그래서 그 규모와 화려함이 요양보다는 열 배나 더했으며, 북경에 버금갈 정도였다. 연행사들은 대남문(大南門) 근처에 있던 숙소 조선관에 짐을 풀고, 예단 가운데 일부를 봉천부에 납부하였다. 그간 사신들을 수행했던 의주(義州)의 군관(軍官)이 심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장계를 가지고 돌아갔다.
금주(錦州) 금주는 광녕에서 영원, 산해관으로 이어지는 명나라의 중요한 군사도시였다. 북쪽은 의무려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동ㆍ남ㆍ서 3면은 도시 양쪽으로 흘러내린 소릉하가 자연 방벽을 이루고 있었다. 1641년부터 1643년 사이 유림(柳琳)이 이끌던 조선 화기병(火器兵: 조총병)이 참전했던 곳이다. 조선군은 사격술이 뛰어나 명나라 쪽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천자의 군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며, 탄환을 빼고 총을 쏘던 이사룡(李士龍)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광녕(廣寧) 현재 북녕(北寧)으로 이름이 바뀐 광녕은 명나라 때부터 북방의 이민족을 감시하는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순무(巡撫)와 총병(摠兵)의 지휘 아래 대규모 군사가 주둔했던 곳으로, 성곽 위에는 창검과 깃발이 늘어서 있어 조선 사신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광녕성 한가운데에는 이성량(李性樑)의 패루(牌樓)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성량은 16세기 후반 요동 지역을 책임졌던 군인으로 그 할아버지는 죄를 짓고 압록강을 건너간 조선 사람이었다. 이성량의 아들은 이여송(李如松)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에서 왜적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패루는 문(門)처럼 생긴 석조 건축물로 용이나 호랑이 등이 문양을 정교하게 새기고, 공적을 기록하였다. 이성량이 오랑캐를 정벌한 공을 기려 세운 이 패루는 산해관 동쪽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여 사신들이 꼭 둘러보는 명물이었다. 광녕의 북쪽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의무려산의 신을 모신 북진묘(北鎭廟) 또한 조선 사신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산해관(山海關)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옥전현(玉田縣) 옥전현은 옛날 유주(幽州) 땅으로 무종산(無終山)과 연나라 소왕(昭王)의 묘가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호질(虎叱)」창작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박지원은 당시의 정계나 도학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여「호질」을 자신의 창작이라고 하지 않고, 옥전의 심유붕(沈由朋)의 집에 걸려있는 족자를 베껴온 것이라고 하였다. 심유붕 역시 그 족자를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계주(薊州)의 시장에서 사다 벽에 걸었다고 이야기하였다.
계주(薊州) 계주는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어양군(漁陽郡)으로,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킨 곳으로 유명하다. 성 안에 있는 독락사(獨樂寺)는 당(唐)나라 때 건축했으나 요(遼)나라 때 중건해서 현재 요나라 3대 사원의 하나로 꼽는 절이다. 관음각 안의 아홉 길의 금불과 와불(臥佛)로도 유명하다. 또한 성 안에 있는 어양교(漁陽橋)의 좌우로 양귀비(楊貴妃)와 안록산의 사당이 마주하고 있었다. 조선 사행들은 대개 당나라를 그르친 두 인물을 위한 사당을 짓고 명복을 비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북경(北京) 북경은 옛 연나라 때의 수도였으며, 금나라 때에는 연경(燕京), 원나라 때에는 대도(大都)라 불렸다. 명나라가 건국된 뒤에 수도가 남경(南京)에서 여기로 옮겨오면서 북경(北京)이라 불렸고, 청나라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수도이다. 황제가 살고 있다 하여 황경(皇京)ㆍ제경(帝京)ㆍ경사(京師)라고 불렸다. 조선 사신은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면서 공물을 바치고, 외교 관계를 맡고 있는 예부(禮部)를 비롯한 해당 관청에서 현안을 논의하는 등 공식 일정을 수행하였다. 사신들은 공식 일정이 없는 날에는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거나 때에 따라서는 북경 시내를 구경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관리와 문인(文人), 시정의 상인(商人),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하였다. 또한 중국 정부를 통해 받거나 유리창(遊離廠) 등의 서점에서 직접 구입한 서적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자양분을 이루었다. 사신을 수행한 역관과 상인들은 숙소에서 시장을 열어 국제무역의 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삼강(三江) 조선의 의주(義州)에서 중국 사이에 놓인 압록강은 크게 세 줄기로 나뉜다. 의주 쪽으로 붙어 흐르는 물줄기가 압록강 본류를 건너면 중강대(中江臺)라 부르는 섬이 있다. 여기에서 바로 중강개시(中江開市)가 열렸다. 그 다음에 있는 작은 물줄기는 소서강(小西江)이라고 부른다. 여기를 건너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중국 땅 분수령(分水嶺)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건너야 한다. 만주어로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라는 애하(愛河) 또는 애랄하(愛剌河)ㆍ애합하(愛合河)라고 부른다. 조선에서는 세 번째 물줄기라고 해서 삼강(三江)이라고 했고, 명나라에서는 구련성의 옛 이름인 진강부(鎭江府)에서 가져와 진강(鎭江)이라고 불렀다.
책문(柵門) 책문은 변문(邊門)이라고 하는데 압록강과 130리가 떨어져 있다.‘책(柵)’이란 한길 반 길이의 나무를 늘어세운 것으로, 사람이나 말이 드나들 틈이 없고 나무를 가로대어 그 중간을 엮어 튼튼한 경계선이 되었다. 청나라는 봉황성으로부터 서쪽으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둘레 1,800여 리에 이르는 울타리를 쳤고, 그 중간에 총 17개의 문을 두었다. 그리고 각 문마다 지키는 관병을 두었고, 그 주위에 장정들을 선발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책문은 조선과 청나라의 실질적인 국경이었고, 그런만큼 일정한 통관 절차를 밟아야 했던 곳이었다. 연행사들은 역관을 보내 사신의 인적 사항과 인마(人馬)의 수 등을 적은 문서를 보냈고, 책문의 관리자인 봉성장(鳳城將)이 나와 인마의 수를 세고 들여보냈다. 간혹 이 통관 절차를 엄격하게 할 때가 있어, 연행사들은 책문의 관리 책임자부터 말단의 호송 군조들에게까지 종이ㆍ부채ㆍ붓ㆍ담뱃대 등의 예물을 나누어 주었다.
요동벌(遼野) 연행사들이 석문령(石門嶺)을 넘어서면 언덕 하나 없이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져 하늘에 닿은 요동벌이 눈에 들어온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살던 연행사들에게 요동벌은 하나의 시각적 충격이자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하는 장소였다. 특히 새로운 천체관을 육안으로 확인해주는 공간이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天圓地方]는 전통적인 천체관은 17세기 이후 지구는 둥글다[地球]는 과학적 천체관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연행사들은 요동벌에 와서 지평선에 닿은 하늘의 모양이 가마솥을 엎어놓은 듯한 것을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단서를 찾았다.
고려보(高麗堡) 고려보는 풍윤을 지나 옥전현 못미쳐 있는 마을이다. 병자호란 때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고려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거의 100여 호가 모여 살았는데, 조선의 사행들이 이곳을 지나며 주민들에게 조상과 집안을 캐어 묻는 일이 많아졌고, 주민들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기를 피하였다. 주민들은 오랑캐에게 잡혀온 것이 부끄럽고,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만 같아 사행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그 숫자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고려보 부근에는 상당한 넓이의 논이 있어 벼농사를 지었다. 시장에 밤절편, 송편 따위가 있어 사람들이 고려떡이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 떡장수들이 조선의 떡을 본따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향 생각이 절실하던 사행은 떡을 많이 사 먹으므로, 주민들이 떡함지를 들고 나와 팔기도 하고 그냥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후대에 오면서 공짜를 바라는 사행의 하인들과 조선에 대한 향수가 점점 사라지는 주민들 사이에 다툼이 생겨 서로 원수가 되었다고 한다.
밀운(密雲) 밀운현(密雲縣)은 북경에서 만리장성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던 현으로, 한(漢)나라에서는 백단현(白檀縣)이라 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서 “조공(曹公: 조조)이 백단(白檀)을 지나서 오환(烏丸)을 유성(柳城)에서 깨뜨렸다.”라고 한 곳이 이곳이다. 명나라 홍무제 때에 세운 성과 만력제 때에 세운 성이 나란히 이어져 있다. 박지원이 열하로 가면서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一夜九渡河] 현장으로, 현재는 북경 시민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하는 저수지로 유명하다.
고북구(古北口) 고북구는 만리장성 가운데 북경(北京)에서 1시 방향에 있는 지점으로, 옛날 한족이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세운 성곽이다. 서남쪽에 있는 거용관(居庸關)과 함께 북경장성의 중요한 관문이다. 먼 옛날부터 내몽골과 북경을 잇는 교통로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군사적인 요충지로 중시되어 ‘서울의 자물쇠’[京都鎖鑰]라 불렸다. 1780년 8월 5일 박지원이 고북구를 지난 소회를 적은「(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로 유명해졌다.
열하(熱河) 열하는 청나라의 황제가 임시 주재하는 행재소(行在所)가 있던 곳이다. 청나라는 근거지인 만주를 비우고 북경을 수도로 옮긴 이후 몽고족을 비롯한 북방 민족의 동향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매년 여름에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황제는 만리장성을 넘어와 이곳에서 머물렀다. 처음에는 간단한 행재소가 있었으나, 1703년(강희 42)부터 1792년(건륭 57)까지 대규모의 공사를 벌여 궁전과 사원을 건축했다. 열하의 궁전과 원림(園林)을 통틀어 ‘피서산장(避暑山莊)’, ‘열하행궁(熱河行宮)’, ‘승덕리궁(承德離宮)’, ‘하도(夏都)’, ‘새외경도(塞外京都)’로도 불린다. 피서산장이란 더위를 피하는 별장이라는 소박한 이름이지만, 강희제 때부터 매년 정무ㆍ외교ㆍ종교ㆍ문화ㆍ국방 등의 중요 국사를 집무하던 행궁이요 이궁이었다. 조선 사행에서는 두 차례 열하를 방문했는데, 1780년 건륭제의 고희연과 1790년 건륭제의 팔순연을 축하하는 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