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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행 문화교류

문학

마음을 터놓고 글로써 교유하다

사행원들은 중국의 선비들과 많은 교류를 가지며 필담을 서로의 나라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시를 주고 받으며 교류하였다. 여러 선비들과 깊은 교유를 가졌던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의 일화를 통해 사행길에서 조선의 선비들과 중국의 선비들이 어떤 문학적 교류를 했는지 살펴보자.

「봉사조선창화시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명(明)나라 봉사(奉使)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集賢殿 學士)인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사이에 서로 나눈 창화시(唱和詩)를 모아 권축으로 만든 것을 광서(光緖) 을사년(乙巳年)에 개장한 것이다.

천고의 기이한 만남 : 홍대용의 북경 여행

1766년 2월 북경의 유리창(琉璃廠) 거리에서는 한중 교류사의 새 지평을 여는 천고의 기이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는 36살의 나이로 연행에 올랐던 담헌 홍대용과 항주에서 온 세 선비와의 사귐이다. 연암 박지원은 홍대용의 묘지명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사귐을 이렇게 기억해 낸다.

언젠가 그는 숙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갈 때 따라가 유리창에서 육비(陸飛)ㆍ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筠) 등을 만났다. 세 사람은 다 집이 전당(錢塘)에 있는데 모두 문장과 예술에 능한 선비였으며, 그들이 교유한 이들도 모두 나라 안의 저명한 인사였다. 그러나 모두들 덕보를 ‘대유’(大儒)라 하여 떠받들었다. 그들과 더불어 필담한 수만 마디의 말은 모두 경지(經旨)ㆍ천인 성명(天人性命)ㆍ고금출처대의(古今出處大義)에 대한 변석(辨析)이었다. 굉사(宏肆)하고 준걸(儁傑)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그리고 헤어지려고 할 때, 서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니, 황천에서 만날 때 아무 부끄러움이 없도록 생시에 더욱 학문에 면려(勉勵)하기를 맹세하자’ 하였다.

엄성의 초상화
나감(羅龕)이 그린 것으로 엄성이 죽고 난 뒤 그의 형 엄과가 만든 추모첩에 실려 있다. (유홍준 소장)

덕보는 엄성과 특히 뜻이 맞았으니, 그에게 풍간(諷諫)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을 때를 따라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때 엄성이 크게 깨달아 이에 뜻을 결단하였다. 그후 남쪽으로 돌아간 뒤 몇 해 만에 민(閩)이란 땅에서 객사를 하였는데, 반정균은 덕보에게 부고를 하였다. 덕보는 이에 애사(哀辭)를 짓고 향폐(香幣)를 갖추어 용주에게 부치니, 이것이 전당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그 날 저녁이 대상(大祥)이었다. 대상에 모인 사람은 서호(西湖)의 여러 군에서 온 사람들인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르기를, “명감(冥感)의 이른 바다”라고 하였다. 엄성의 형 엄과(嚴果)가 분향 치전(致奠)하고, 애사를 읽어 초헌(初獻)을 하였다. 엄성의 아들 엄앙(嚴昻)은 덕보를 백부라고 써서 그 아버지의 『철교유집(鐵橋遺集)』을 부쳐왔는데, 전전하여 9년 만에 비로소 도착하였다. 유집 중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영정이 있었다. 엄성은 민에서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기증한 조선산 먹과 향기로운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먹을 관 속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오하(吳下)의 사람들은 유별난 일이라 하여 성하게 전하며, 이것을 두고 다투어가며 서로 시문으로 찬술(撰述)하였으니, 이에 대한 사실은 주문조(朱文藻)란 사람이 편지를 하여 그 형상을 말해주었다.

- 박지원, 「홍대용묘지명」, 『국역 담헌서』4

연행록의 화폭에 화려하게 그려진 교유의 기록은 이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교유의 기록들이야말로 조선 후기 실학의 시대를 꽃피우는 자양이었다. 이것은 16세기 접어들면서 소중화 의식, 바꿔 말하자면, 중화 문명과의 동질성을 통해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려 했던 인식의 청산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연행길에 오른 북학파의 지식인들은 구체적 경험을 통해 그들의 사유를 승인할 수 있었다. 교유에 바탕을 둔 연행의 경험을 계승하고 축적하면서 조선의 실학은 새로운 학문의 방법을 받아들여 그 학적 면모를 갖추게 되는 한편, 시대를 이끌어 가는 윤리와 철학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1765년 영조(英祖) 41년 홍대용은 계부 홍억(洪檍)의 연경사행(燕京使行)에 수원(隨員)으로 따라간다.[그림] 장도에 오른 그의 소망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보이는 것이 새로운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내가 크게 원하는 바는 하나의 아름다운 수재(秀才)나 마음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서 그와 더불어 실컷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의 소망은 기적처럼 이루어지는데, 1766년 연경에서 엄성ㆍ반정균ㆍ육비 세 사람을 만나 의형제의 사귐을 맺게 된다. 이 기이한 사연은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으로 지어져 북학파 선비들이 돌려 읽으며 장차 소원하는 바가 된다.

『일하제금합집』에 실린 홍대용 일행의 초상화.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부사(副使)의 군관 김재행, 상방 비장(裨將) 이기성, 서장관(書將官) 홍억, 부사 김선행, 정사(正使) 이훤의 초상이다

2월 초1일에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망원경을 사려고 유리창에 갔다가 두 사람을 만났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문인의 기질이 있다. 그런데 모두 안경을 썼으니 아마 근시이던 모양이다. 이(李)가 청하여 말하기를 “내가 친척이 있어서 안경을 구하는데 거리에서 진짜 물건을 사기 어렵다. 당신이 쓴 안경이 근시안에 매우 적합할 것 같은데 내게 팔 수 없겠는가? 당신은 혹 여벌이 있을 것이고 새로 구한다 해도 쉽게 살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니 그 한 사람이 벗어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에게 구하는 사람은 아마도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내가 안경 하나를 아끼겠는가? 팔기는 무엇을 팔아. 가지고 가게.” 하고 뿌리치고 가버린다. 기성은 자기가 경솔히 말했다가 공연히 남의 물건을 가지게 된 것을 후회하여 곧 안경을 가지고 쫓아가서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아까 한 말은 장난으로 한 말이요, 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물건을 받을 수 없다.” 하니 두 사람이 모두 불쾌해 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조그만 물건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는 서로 도와 줄 의리가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사양하는가?” 한다. 기성은 부끄러워서 감히 다시 말을 못하고 그 내력을 물었더니 절강(浙江)의 거인(擧人)으로서 과거 보러 북경에 올라와 정양문(正陽門) 밖 건정동(乾淨衕)에 하숙하고 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기성은 그날 저녁에 그 안경을 가지고 내게로 와서 그 사유를 말하고 나에게 화전(花箋)을 구해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보답하겠다고 한다.

- 항전척독(杭傳尺牘),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 『국역 담헌서』

이렇게 하여 만난 것이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均)이다. 엄(嚴)은 자가 역암(力闇)이요 호는 철교(鐵橋)이며 나이는 35세였고, 반(潘)은 자가 난공(蘭公)이요 호는 추루이며 나이는 25세였다. 이로부터 이들은 거의 날마다 찾아오고 찾아가고 하면서 경의(經義)ㆍ성리(性理)ㆍ시문(詩文)ㆍ서화(書畵)ㆍ역사(歷史)ㆍ풍속(風俗)ㆍ과학(科擧) 등에 관하여 흉금(胸襟)을 터놓고 필담을 교환하였다. 2월 23일의 모임에는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생기게 되었으니 그는 육비(陸飛)이다. 그의 자는 기잠(起潛)이요 호는 소음(篠飮)이요 나이는 48세다. 이렇게 만난 그들은 2월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이나 만났다. 그리고 만나지 못한 날은 매일 편지를 주고받았다. 홍대용은 그때의 만남을 “한두 번 만나자 곧 옛친구를 만난 듯이 마음이 기울고 창자를 쏟아 형님 동생 하였다.”고 했으니, 그 우정의 깊음을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들은 주자학ㆍ양명학과 조선역사에 대해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고 또 무수한 시문을 주고받았다.

홍대용은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엄성과 특히 가까웠다. 엄성은 민(閩)이란 땅에서 병이 위독할 때 홍대용이 선물로 준 조선산 먹을 꺼내어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운명하였다. 그의 죽음을 듣고 하늘이 자신을 괴롭힘이 너무도 혹독하다며 통곡한 홍대용이 보낸 애사와 향폐는 엄성이 죽은 지 두 해째 맞는 제사에 당도하여 항주의 선비들을 경탄시켰다. 엄성은 홍대용과 이기성의 초상화도 그려 주었다. 엄성은 본래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백묘 인물화에 능하여 자화상을 그린 일도 있었는데 그가 그린 홍대용의 초상 또한 백묘인물화였다.[그림] 반정균은 홍대용을 「담헌기(湛軒記)」라는 글에서 이렇게 칭송했다.

홍대용의 초상 청의 선비 엄성이 그림 것으로 주문조(朱文藻)가 엄성의 글과 그림을 모아 엮은 책인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에 실려 있다.

홍대용은 기상이 높고 문견이 넓으니, 중국 서적 중에 보지 않는 것이 없고, 율력ㆍ전진의 법과 염락관민의 종지를 궁구하지 않음이 없다. 또한 시문으로부터 산수에 이르기까지 능치 못함이 없고 이론을 들으매 옛사람을 일컫고 의리를 근본으로 삼으니 짐짓 유자의 기상이 있다. 이는 중국에서도 쉽지 않은 인품이거늘 어찌 진한의 황원한 지경에서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

- 반정균, 「湛軒記」, 홍대용, 『국역 담헌서』

담헌은 연경에서 결의형제를 맺었던 항주(杭州)의 선비 육비ㆍ엄성ㆍ반정균 등과 기타 중국인 벗들과 귀국 후에도 서신이 끊이질 않았다. 이 교환한 서신 모음이 『항전척독(杭傳尺牘)』이다. 그 내용을 보면 육비와 4통, 엄성과 4통, 엄성의 형 구봉(九峯)과 3통, 엄성(嚴誠)의 아들 엄앙과 2통, 반정균과 4통, 서광정(徐光庭)과 1통, 등문헌(鄧汶軒)과 4통, 손용주(孫蓉洲)와 5통, 조매헌(趙梅軒)과 2통, 주랑재(朱郎齋)와 1통 등 총 30통의 서신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경의ㆍ역사ㆍ문예ㆍ서화ㆍ수양ㆍ예속ㆍ유불도의 비교, 주륙(朱陸)의 이동, 육왕(陸王)의 비판 등이다.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은 건정동에서 엄성ㆍ반정균ㆍ육비 세 사람을 만나서 필담한 ‘담초(談草)’이다. 그들은 하루하루 서로 만나는 회수가 잦아지며 피차의 학문ㆍ취미ㆍ성격ㆍ가계 등을 서로 알게 되자 더욱 정분이 두터워지고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지기로서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것이다.

양 한 마리를 잊다 :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연행 이후 13년이 지난 1778년에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경에 갔고, 2년 뒤인 1780년엔 연암 박지원이 중국을 다녀와서는 문체반정을 이끈 문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다. 박지원은 정조 4년, 곧 1780년에 그의 삼종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청 고종(高宗)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 성경(盛京)ㆍ북평(北平)ㆍ열하(熱河)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이 책을 엮었다.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ㆍ지리ㆍ풍속ㆍ습속ㆍ고거ㆍ건설ㆍ인물ㆍ정치ㆍ경제ㆍ사회ㆍ종교ㆍ문학ㆍ예술ㆍ고동 등에 이르기까지 이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시야는 승지ㆍ명찰에 그치지 않고,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이 놓였다.

또한 『열하일기』는 중국의 수많은 문사와의 교류를 담고 있다. 특히,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인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은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ㆍ기풍액(奇豐額)ㆍ왕민호(王民皥)ㆍ학성(郝成) 등과 두 나라의 문물ㆍ제도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그 대화가 월세계(月世界)ㆍ지전(地轉)의 설에까지 이른다. 「경개록(傾蓋錄)」 또한 태학에서 청나라 학자와 응수한 기록이고, 「망양록(忘羊錄)」은 윤가전ㆍ왕민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한 견해를 나눈 기록이다. 그리고 윤가전과 함께 전일 태학에서 미진한 이야기를 계속한 기록이 「혹정필담(鵠汀筆談)」에 전한다. 그 가운데 「망양록」의 한 대목은 이들의 진정어린 교유를 정감 있게 보여준다.

아침에 윤형산(尹亨山) 가전(嘉銓)과 왕혹정(王鵠汀) 민호(民皥)를 따라서 수업재(修業齋)에 들어가 악기(樂器)를 훑어보고 돌아오다가 형산의 처소에 들렀더니 윤공은 양을 통째로 쪄 놓았는데, 이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차린 것이다. 바야흐로 악률(樂律)이 고금에 같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느라고 음식 차려 놓은 지가 오래지만 서로 먹으라 권하지 못했는데, 얼마 있다가 윤공이 양을 아직 찌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심부름하는 자가 대답하기를, 차려 놓은 것이 벌써 식었다고 하므로, 윤공은 자기가 정신을 못 차리고 두서가 없었다고 사과한다. 나는, “옛날, 공자는 소(韶)를 듣노라고 고기맛을 잊었다더니, 이제 나는 대아(大雅)의 이야기를 듣다가 양 한 마리를 잊었습니다.” 했더니, 윤공은, “이른바 장(臧)과 곡(穀)이 모두 양을 잊었다는 것이올시다.” 하여, 서로 크게 웃었다. 이에 그 필담(筆談)한 것을 모아서 망양록(忘羊錄)이라 이름한다.

윤가전은 양 한 마리를 쪄서 아침 일찍 방문한 박지원을 극진히 대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음율의 고금 변증에 관한 이들의 필담은 그 정겨운 만큼이나 깊어 차려놓은 음식을 잊을 정도였다. 겨우 논의하던 바를 수습하여 윤가전이 미리 준비한 양 한 마리가 쪄진 것을 묻자, 시비는 이미 식은 지 오래라고 한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쪄 놓은 양을 잊었으니, 이 필담을 일러 「망양록(忘羊錄)」이라고 부른 것이다.

북경 학계와의 교류: 박제가와 유득공

홍대용이 귀국한 지 8년이 되는 1773년(건륭 38)부터 중국에서는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이라는 경이적인 대사업이 시작됐다. 이 사업은 건륭 황제가 필생의 힘을 기울인 문화사업이다. 10년간 361명의 석학을 동원하여 총 36,000책을 4질 제작하여 네 곳의 서고에 보관케 했다. 본래 건륭제가 이 편찬사업을 벌인 목적은 금서를 색출하기 위한 것이나, 미증유의 이 학술사업으로 전국의 학자들이 연경에 모여 학술을 번창시켰다.

북학파들이 만난 학자들은 대개 이 『사고전서』 편찬위원들이었다. 박제가와 친했던 기윤(紀昀)은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을 맡은 학계의 거물이었으며, 추사 김정희의 스승이 된 옹방강(翁方綱)을 비롯하여 우리 학자와 친밀하게 교류했던 이정원(李鼎元)ㆍ대심형(戴心亨) 등이 이 편찬사업의 담당자였다. 『사고전서』의 편찬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자연히 전국의 책들이 연경의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엄청난 양의 책들이 배에 실려 연경에 들어오면서 유리창은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유리창에는 수십 개의 서점이 있었는데, 조선 학자들에게 많은 책을 구해주고 정보도 제공해 주었다. 학예의 열풍이 불고 있던 연경의 자장 내에 들어온 조선 학자들이 연경에 머물던 청나라 학자ㆍ예술가들과의 접촉이 상당히 높아졌다. 박제가는 알고 지낸 청조 문인이 100명이 넘었다. 게다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이미 연경 학계에 소개되어 박제가의 명성이 상당하였다.

『한객건연집』은 이덕무ㆍ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의 시를 탄소(彈素) 유금(柳琴)이 1777년(정조 1) 선정하여 편집한 시집으로, 필사본이며 간행여부는 알 수 없다. 책머리에 청의 당대 제일가는 시인이던 서호 반정균, 우촌 이조원이 쓴 서문이 있어 편찬경위를 알 수 있는데, 1776년(영조 52) 사은부사로 청에 간 서호수의 막관인 유금이 이조원을 방문하여 『건객시집』을 보이면서 비정을 청했으며, 이조원에게 부탁하여 반정균의 비정도 청했다 한다. 그러므로 본집에는 사가의 시가 각기 수록된 뒤에 각인에 대한 이ㆍ반 두 사람의 평이 첨부돼 있어, 이들 사이의 교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다. 이처럼 박제가가 연경학계에서 유명해지자 만난 일은 없지만 서신으로 교류하는 인사도 생기곤 하였다. 훗날 박제가의 셋째 아들인 박장엄(朴長馣)이 아버지가 중국 문인들과 교유한 시와 편지 등 시문을 2책으로 엮어 펴낸 『호저집(縞紵集)』에는 청조 문인이 무려 172명이나 등장한다. 『호저집』은 박장엄에 의해 편찬된 6권 2책의 필사본이다. 박장엄은 바로 초정의 셋째 아들로 자는 향숙(香叔) 호는 정벽(貞碧)이라 한다. 그는 1780년(정조4년)에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검서관을 역임하고 벼슬은 현령을 지냈다. 『호저집』은 그의 나이 30세 되던 1809년에 편찬한 것으로, 모두 6권 2책으로 되어 있다. ‘호저’라는 말은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이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에게 ‘흰 명주 띠’(縞)를 선사하자, 자산이 그 답례로 계찰에게 ‘모시옷’(紵)을 보낸 고사에서 연유된 것으로, 곧 국제간의 친한 벗들 사이에 주고받은 선물이나 그 교제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는 박제가가 중국의 문인들과 창수한 시문이나 척독 등을 모아 엮은 것으로, 편찬자인 박장엄은 유완원(柳完元)의 「선우기(先友記)」의 편찬의도를 따라 이 책을 엮고 이름을 『호저집』이라 붙였다.

이 책은 4차에 걸친 초정의 연행시기로 나누어 편찬되었는데, 무술(1778)은 권1, 경술(1790)ㆍ신해(1781)는 권2, 신유(1781)는 권3에 각각 배열되어 있다. 상책은 교유 인물들의 과갑ㆍ명호ㆍ작리ㆍ사실 등을 전문한 바에 의해 고찰하고 이것을 모아 엮어 「찬집」이라 하였고, 하책은 서로 주고받은 시문ㆍ척독ㆍ제평 등을 합하여 각 인물별로 엮어 「편집」이라 했다. 상책은 교유인물의 파계와 연원 그리고 사승ㆍ붕우ㆍ출처 등의 제반 사실을 상세히 고찰하여 전기의 형식으로 재구성해 놓았고, 하책은 주고받은 글들을 순서에 따라 나열하고 있다.

『호저집』은 18ㆍ19세기 실학시대의 한중 문인지식층의 교유양상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담헌으로부터 시작된 청조 문인들과의 교류가 양국 문인들의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부터 벗어나 점차 학술과 문화의 상호 교류를 통해 서로의 학문과 예술, 그리고 문화의 수준을 재고시켜보자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그 교유양상도 단순하게 시문을 서로 수창하는 범주에서 벗어나 서로의 역사와 문화ㆍ풍속ㆍ학술의 변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 걸쳐 아주 진지하게 학술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처럼 조선 지식인 사회는 점점 청조 문화와 활발히 교류하였고, 청나라 학문과 예술의 신경향은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어 종래의 고답적인 사상과 학문과 예술을 크게 변화시켰다. 청조 문화와 문물에 대한 박제가의 적극적인 수용 태도는 조선 학계에 북학(北學)의 높은 바람을 일으키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서문에 쓴 박지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북경 학계와 교유를 통해 초정이 다다른 학문적 지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장대한 민족서사시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십일도회고시』는 유득공이 31세때 『동국지지(東國地誌)』를 읽으면서 단군조선의 왕검성, 가야의 김해, 백제의 부여 등 부족국가 이래로 수도가 된 적이 있는 21곳의 옛 도읍을 43수의 시로 읊은 역사회고시이다. 이것은 선후배들이 모두 감동한 명작으로, 박제가와 이덕무가 연경에 갈 때 일종의 민족적 긍지의 징표로 가져가 청조 문인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주어 상찬을 받았다. 그 뒤 유득공이 연경에 갔을 때는 이 시로 인해 도처에서 많은 문사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유득공은 갖고 있던 자신의 수고본을 기윤에게 선물했는데, 나빙이 이걸 탐내서 자기도 한 부 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나 유득공은 가진 것이 없어 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박제가가 다시 연경에 갔을 때 나빙의 책상에 바로 그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가 한 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으니, 자신이 기윤의 것을 빌려 정성껏 베껴서 책으로 꾸며가지고 애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후 기윤이 갖고 있던 유득공의 자필본 『이십일도회고시』 원첩은 옹방강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가 죽자 제자인 섭지선(葉志詵)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청말에 조지겸(趙之謙)의 소유가 되어 그가 『학재총서(鶴齋叢書)』를 출간할 때 이 시집도 간행하였다. 그래서 이 책은 청나라에서 먼저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34년에야 한남서림에서 출간된다.

유득공은 자를 혜보(惠甫), 또는 혜풍(惠風), 호를 영재(泠齋)ㆍ영암(泠庵)ㆍ고운당(古芸堂)이라 하고, 본관은 문화(文化)인데, 영조 25년(1749)에 진사 유운(柳運)의 서자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 3년(1779)에 규장각(奎章閣)이 이룩되자 규장각 검서(檢書)로 발탁되었다. 유득공이 처음으로 연경에 간 것은 본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이 쓰여 지기 11년 전인 정조 14년(1790)이었다. 그의 처음 연행기인 『난양록(灤陽錄)』은 경술년 5월 24일 진하부사(進賀副使) 서호수(徐浩修)의 종관(從官)으로 박제가등과 함께 서울을 출발, 7월 15일 열하(熱河)의 잔치에 참석하여 몽고ㆍ회회(回回)ㆍ안남(安南)등의 왕과 만나고, 8월 13일 연경에 도착하여 황제의 만수절(萬壽節)에 참석했으며, 10월 10일에 압록강을 건너 온 것을 시(詩)로 감상을 쓰고 시의 해설같이 일정기(日程記)를 쓴 것이다. 그리고 기윤(紀畇)ㆍ반정균(潘庭筠)ㆍ이정원(李鼎元) 등 많은 그 곳의 학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실려 있다.

유득공의 『연대재유록』에도 청나라 학자들과의 깊은 교유가 잘 그려져 있다. 연경에 도착한 이튿날 대학자이며 상서(尙書)인 기윤을 방문하여 『주자전서』의 구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자 기윤은 유득공의 시문을 보여주기를 청했다. 하여 몇 편의 글을 주어 평을 청하고 그쪽 학계의 실정과 서지(書志)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유구에 사신을 갔다 온 이정원(李鼎元)을 만나 청과 유구ㆍ일본 등과의 외교관계를 알아보고는 『주자전서』를 구하는데 협조를 얻었다. 또 진전(陳鱣)이란 신진 학자를 만나 우리나라 사정에 대한 질정을 받는다. 진전은 『설문해자정의(說文解字正義)』 30권을 저술한 훈고학(訓誥學)의 대가였다. 그리고 역시 진전의 친구이며 『맹자해의(孟子解誼)』ㆍ『소미아교증(小爾雅校證)』 등 많은 저술이 있는 전동원(錢東垣)을 만났는데, 그가 『사고전서(四庫全書)』교감에 쓰겠다고 유득공의 저작을 굳이 청하므로 「발해고(渤海考)」 의례(義例)를 적어 주었다.

북학파의 지기 가운데 유득공은 뒤늦게 중국을 왕래하였지만,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면서 자신의 대청관 내지 문화의식을 피력하였다. 그가 중국 문사들과 교유하였던 시기는 『북학의』와 『열하일기』가 당대 지식인층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정조의 문체반정으로까지 비화되었던 때였다. 따라서 유득공의 저술과 교유의 내용은 이와 같은 현실의 모순과 문제의식을 진전된 형식으로 구체화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