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 경로
노정 속 산수
사행 노정 속에서 만났던 산과 강, 고개 중국으로 가는 사행노정 중 압록강에서 요양까지는 8개의 참이 있었는데 이를 동팔참이라고 한다. 동팔참은 분수령 한 가닥이 둘로 갈라지면서, 한 가닥은 북쪽으로 달려가서 안산 ㆍ천산 등의 산이 되었고, 한 가닥은 송골ㆍ봉황 등의 산으로 되었다. 분수령 동쪽의 큰물은 팔도하(八渡河)로서 중강(中江)에 들어가고, 서쪽 큰물은 바로 태자하(太子河)로 삼차하(三叉河)에 들어가서 요하(遼河)에 통한다. 산해관 밖의 큰물은 금주의 대릉하ㆍ소릉하와 심양의 혼하(渾河)ㆍ주류하(周流河)와 합하여 발해만(渤海灣)으로 들어갔다. 이는 모두 동팔참의 물이며, 강물줄기가 매우 급하여 조금만 비가 오면 사람들이 통하지 못하였다. 또 중국의 산천은 준험한 영(嶺)과 큰 하수가 많은데, 청석령(靑石嶺)은 가장 험한 고개였다. 또한 이곳은 병자호란 후에 봉림대군이 끌려가다 읊은 시조로 유명해졌다. 광녕의 의무려산을 지나 사행노정의 꼭 절반이라 하는 십삼산(十三山)을 거쳤다. 너무 험해서 북경 가는 길에는 잘 오르지 않았던 각산에 있는 각산사를 김창업은 구경하고 갔었다.
봉황산(鳳凰山) 봉황산은 멀리서 보면 봉우리 몇 개만 우뚝 솟은 것 같지만 산 아래로 가까이 와서 보면 수많은 바위 봉우리가 마치 창을 벌여 세워 병풍을 둘러친 듯 험하게 생겨 도봉산(道峰山)이나 수락산(水落山)과 비슷하게 생겼다. 전설에 따르면 산 정상에 크고 작은 두 개의 큰 바위가 있는데, 큰 것이 ‘봉’, 작은 것이 ‘황’이라고 하고, 그 바위의 모양이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다고 하여 봉황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당 태종 이세민이 요동 정벌에 나서서 이 산을 찾았는데, 한 굴에 이르러 봉황이 그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울어 봉황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도 한다. 이항복(李恒福)이나 이정구(李廷龜)는 고구려의 동명왕이 도읍을 한 곳이라고 하였고, 김창업(金昌業)의 경우에는 봉황산 있는 산성을 양만춘(楊萬春)이 당나라군을 격퇴했던 안시성(安市城)으로 보기도 하였다.
송골산(松鶻山)
송골산은 구련성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행이 아침을 먹던 곳이다. 금석산(金石山)ㆍ정석산(頂石山), 송학산(松鶴山)ㆍ해청산(海靑山)이라고도 한다. 『계산기정(薊山記程)』에 그 정황이 잘 그려져 있다.
주방 종놈은 시냇가에 솥 늘어놓았지만 / 廚奴列鼎淺溪濱
이슬맞으며 자고 바람맞으며 밥먹기 너무나 괴로워라 / 露宿風餐太苦辛
오랑캐 하늘이라 대낮에도 찬 눈 날려 / 胡天白日飛寒雪
금석산 빛 모두가 은이로구나 / 金石山光片片銀
호타하(滹沱河) 호타하는 삼하현(三河縣)에 못미쳐 있는 강이다. 착하교(錯河橋)라고도 하는데, 물이 깊고 언덕이 높았다. 겨울에는 얼어붙었기 때문에 얼음 위를 걸어서 건너갔다. 본래 이름은 구하(朐河)이다. 호타하에서 삼하현 사이에는 토합(土蛤)이라는 조개가 나오는데, 회로 만들면 맛이 좋다고 하였다.
압록강(鴨綠江)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총 800km를 흘러 서해로 들어가며, 중국과 조선의 자연 국경을 이루고 있는 강이다.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강물 빛이 오리[鴨]의 머리[頭] 빛깔처럼 푸르다[綠]는 뜻의 ‘압두록(鴨頭綠)’을 줄여 ‘압록(鴨綠)’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마자수(馬訾水)나 청하(淸河)라고 하고, 광개토대왕비에서는 아리수(阿利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대총강(大總江)이라고 부른다. 옛날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땅이고, 부여(夫餘)의 남쪽 경계였다.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이 모두 그 안에 있었고, 나중에는 발해(渤海)에 속했다. 고려 때까지는 여진과 더불어 할거(割據)하다가, 조선에 이르러 강의 북쪽을 중국에 넘겨주면서 국경이 되었다.
청석령(靑石嶺)
책문에서 요양에 이르는 길에는 분수령(分水嶺)ㆍ고가령(高家嶺)ㆍ유가령(兪家嶺) 등 고개가 많은데, 청석령은 마천령(摩天嶺: 회녕령 會寧嶺)과 함께 가장 험한 고개였다. 첨수참에서 10리 길에 있고, 돌 빛이 푸르기에 ‘청석(靑石)’이란 이름을 얻었다. 정상에 못미쳐 관우(關羽)를 신으로 모시는 관왕묘(關王廟)가 있어, 연행사들은 모두의 무사함과 소원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무엇보다 병자호란 후 심양에 인질로 끌려가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남긴 한이 서린 시조로 유명해졌다.
청석령 지나거냐 초하구(草河口) 어디메뇨
호풍(胡風)도 참도 찰사 궂은비는 무슨 일고
뉘라서 내 행색 그려내어 님 계신 데 드릴고.
태자하(太子河) 태자하는 구요동(舊遼東)과 신요동(新遼東) 사이에 흐르는 강으로 연행사들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이었다. 태자하라는 이름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만주어 탑사합호(塔思哈虎)가 와전된 것인데, 당시 사람들은 ‘태자’라는 말에 혼동을 빚어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냈다.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이 진시황(秦始皇)의 핍박을 피해 도망가다가 여기에서 잡혀 죽은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한편 윤근수(尹根壽)나 홍경모(洪敬謨)는 당 태종의 요동 정벌군에 맞서 태자하 주변의 성을 지키던 고구려 태자가 강에 떨어져 죽으면서 생긴 이름이라고 보았다. 홍경모는 한발 더 나아가 평양성에 있을 태자가 이곳까지 올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로 추정하였다. 고구려의 백암성이 태자하 가에 있었다.
각산(渾河) 혼하는 야리강(耶里江)ㆍ심수(瀋水)ㆍ요수(遼水)라고도 하는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흘러와 해성(海城)의 삼주하(三酒河) 근처에서 태자하와 합류하여 대요하(大遼河)가 되어 남쪽으로 진행하여 요동만(遼東灣)으로 흘러들어 간다. 심수의 옛 물결은 지금 심양(瀋陽)의 북쪽으로 나 있었으나, 1616 ~ 1626년에 청 태조가 심양에 성을 다시 쌓을 때 물을 끌어 성 남쪽으로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 심양이란 이름은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뜻이다. 봉림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있을 때에 강변에 정자를 지었다고 하고, 세자관에 거주하던 인원들이 먹은 야채를 생산하던 야판전(野坂田)이라는 밭도 이 근처에 있었다. 강의 넓이가 임진강과 비슷한데, 동지사가 북경에서 돌아올 무렵에는 장마로 물이 불어 평소 건너던 다리를 쓸 수 없어 40리를 우회하여 하류의 다리로 건넜다.
요하(遼河) 요하는 주류하(周流河) 또는 거류하(巨流河)라고 하는데, 심양의 혼하(渾河)와 요양의 태자하(太子河)를 합하여 발해만(渤海灣)으로 들어갔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수량이 적어 건너는데 별 문제가 없었는데, 우기에는 물이 들판으로 넘쳐 흘러 요동 평야가 늪이 되어 연행사들이 건너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58년 외요하(外遼河)를 가로막은 뒤부터 혼하는 독립 수계가 되었다.
천산(千山)
천산은 ‘동북 지방의 빛나는 구슬[東北明珠]’로 일컬어지는 명산으로, 요양에서 남쪽으로 50km, 안산(鞍山)에서 동남쪽으로 17km 지점에 있다. 본래 999개의 봉우리만 있었는데, 이를 아쉽게 여긴 사람들이 연쪽 기둥을 하나 세워 1,000개를 채우면서 ‘천산(千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 속에 기이하지 않은 봉우리가 없고, 무언가를 닮지 않은 돌이 없고, 오래되지 않은 사찰이 없음을 자랑하여, 요동제일산(遼東第一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1,400년 전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수ㆍ당 시대에 사찰이 들어섰으며, 명ㆍ청 시대에 도교의 도관이 세워지면서 불교와 도교가 함께 거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사행 노정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연행사 가운데 산에 오른 사람이 몇명 되지 않는다. 1604년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가던 이정구(李廷龜)가 천산에 올라 조월사(祖越寺), 용천사(龍泉寺), 성여암(聖與庵) 등을 찾아보았다. 1712년 김창업(金昌業)이 이정구가 남긴 「각산여산천산유기록(角山閭山千山遊記錄)」을 지침삼아 용천사ㆍ조월사ㆍ대안사(大安寺) 등을 둘러보았다. 이정구는 사행의 정사(正使)인데다 부사인 민인백([閔仁伯), 서장관 이준(李埈)이 따라나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자제군관이었던 김창업은 형인 정사 김창집(金昌集)과 시를 주고받으며 옥신각신 다툰 뒤에야 산에 오를 수 있었다.
대릉하(大凌河) 석산참과 쌍양점(雙陽店) 사이에 흐르는 강이다. 책문에서 북경까지 물의 이름이 하(河)라고 붙은 것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컸다고 한다. 봄에 비가 적게 내리면 다른 하들은 모두 다리를 통해 건널 수 있었지만, 대릉하만큼은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대릉하에 도착하면 늘 티끌과 모래가 요란했는데, 명ㆍ청 교체기 이후의 사행들은 그 원인을 바람과 같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명나라 조대수(祖大壽)의 4년 혈전(血戰)에서 죽은 원혼들의 억울하고 불평하는 기운으로 보았다. 강의 북쪽에 조대수가 지키던 대릉하성(大凌河城)은 전투가 끝난 뒤 허물어져 흔적만 남았다.
소릉하(小凌河) 소릉하는 명청 교체기의 격전지인 금주위(錦州衛)와 송산보(松山堡) 사이에 있던 강이다. 지금은 금주시(錦州市)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서쪽의 대릉하(大凌河)와는 30리의 거리를 두고 있다. 강의 서쪽 변에는 산꼭대기에서 평지까지 모두 참호가 있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 이 때문에 늘 안개가 꼈다고 한다.
의무려산(醫巫閭山)
의무려산은 심양에서 서남쪽으로 80km 지점, 북녕시 서북에 위치하는 산이다. 음산(陰山)산맥의 한 줄기이고, 주봉인 망해정(望海亭)은 해발 866m이다. 우리나라의 삼각산의 백운대(白雲臺) 보다 조금 높을 뿐인데, 요동벌 한쪽 끝에 있기 때문에 전망이 좋다. 순(舜) 임금이 봉한 중국 12대 명산 중의 하나이며, ‘오악오진(五嶽五鎭)’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의무려산의 신을 모신 북진묘(北鎭廟)가 있다. 역대 황제들은 새로 등극하거나 전란ㆍ재난 등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냈고, 백성들도 산에 유람하기 전에 사당에 들러 무사 평안을 기원하였다.
의무려산에는 도교의 수행처인 도관(道觀)과 불교 사원이 많고, 각종 비석과 정자들을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다. 또한 기암괴석과 각종 나무, 동굴 등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이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여 아름다웠다. 성수분(聖水盆), 관음각(觀音閣), 산 속 복숭아나무가 가득했던 도화동(桃花洞), 원나라의 유능한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의 독서당(讀書堂), 큰 바위덩어리 위에 얹어져 있어 발해가 내다보인다는 망해사(望海寺) 등의 유적이 있다.
많은 연행사들이 의무려산에 올라가고 싶어했지만, 사행로에서 4km 이상 떨어져 있어 함부로 오르지 못하였다. 이정구[1617년], 김창업[1713년], 조문명[1725년] 등이 돌아보고 문학작품을 남겼다. 의무려산을 가장 깊게 각인시킨 사람은 1766년에 찾은 홍대용이었다. 귀로에 의무려산을 찾았던 홍대용은 조선 선비 허자(虛子)와 의무려산에 은거해 있던 실옹(實翁)이 문답하는 형식의 철학소설 『의산문답(醫山問答)』을 지어 전통적인 가르침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조선의 선비를 비판했다.
십삼산(十三山)
광녕의 북진묘(北鎭廟)를 지나 연행사들이 묵었던 곳이 십삼산참(十三山站)이다. 봉우리가 13개라서 붙은 이름이다. 봉우리들이 높지 않은데, 너른 들판 가운데 솟아 있기 때문에 연행사들의 시선을 많이 끌었다. 어떤 사람은 의무려산의 줄기라고도 한다. 북경으로 가면서 보면 봉우리가 12개이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 보면 13개라고 한다. 본래 석산(石山)인데, 발음이 비슷한 ‘십삼(十三)’으로 잘못 알려졌다고 하여 석산참(石山站)으로 표기한 연행록도 많다. 또 벌을 닮았다고 하여 봉산(蜂山), 소라처럼 생겨서 나산(螺山), 자라와 비슷하다 하여 오산(鰲山), 사다리와 같다하여 제자산(梯子山)이라고도 부른다.
홍경모에 따르면 강희제가 동쪽으로 순행을 와서 이 산 아래 머무르면서 ‘수산(壽山)’이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십삼산을 사행길의 중간으로 여겨, 여기에 이르면 군뢰(軍牢)를 보내 의주 관아와 집에 안부 편지를 보내곤 했다.
각산(角山)
각산(角山)
각산은 산해관(山海關) 북쪽 10리에 있는 해발 500m의 산이다. 그 산등성이를 따라 만리장성이 있는데, 따로 각산장성(角山長城)이라 한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으로 보면, 발해만에 임한 노룡두(老龍頭)는 용의 머리가 되고, 각산은 용의 뿔에 해당한다. 산해관에서 한나절 거리밖에 되지 않지만 연행사들은 공식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북경으로 가는 길에는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귀로에 오르곤 하였다.
산의 정상에 못 미쳐 각산사(角山寺)가 있다. 『임유현지(臨楡縣志)』에는 서현사(棲賢寺)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각산사라는 이름은 공식 명칭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연행사들이 각산사를 본다는 명목으로 각산의 꼭대기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았다. 북쪽에는 첩첩한 산맥이 굽이쳐 내려오고, 그 사이로 보이는 몽골의 초원이 보였고, 동쪽으로는 짙푸른 발해가 펼쳐져 있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로 가득한 이정구의 시와 산문을 본 김창업(金昌業)이 백여 년 뒤[1723년]에 다시 올라 천하를 한눈에 조망했다. 김창업이 각산사의 스님과 주고받은 필담 종이가 전해진 것인지, 그의 각산사 유람 기록[遊角山寺記]이 『임유현지』에 실려 있다.
문필봉(文筆峰) 망해점(亡海店)과 심하역(深河驛) 사이의 지점에서 서남쪽으로 보이는 산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창려현(昌黎縣)에 속하는데, 연행로에서 꽤 떨어져 있어 직접 오르지는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당(唐)나라의 유명한 문인 한유(韓愈)의 할아버지가 창려현에 살았고, 한유의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문필(文筆)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요동벌의 광대한 산맥만 보다 내륙의 산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청수하고 밝고 고왔다.”고 묘사하고 있다.
난하(灤河) 난하는 영평성 서쪽 5~6리에 있는데, 만리장성 북쪽 개평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천안현을 거쳐 노룡새(老龍塞)에 이르러 칠하(漆河)와 합쳐져 낙정현(樂亭縣)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심양에서 이곳까지는 땅이 평평하여 물이 혼탁하여 맑지 않은데 비해 난하는 유달리 물이 맑았다. 또한 유속이 빨라 강 밑바닥은 모두 흰 조약돌로 되어 있고, 모래밭이 정결하다고 하였다. 난하 가에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사당인 청절묘(淸節廟)가 있었다. 박지원은 「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에서 “요동서부터 서쪽으로 하(河)로 이름 붙인 강물은 어데 없이 탁류였으나 난하 한 군데만 고죽사(孤竹祠) 아래 와서 물이 고여 호수가 되면서 거울같이 물빛이 맑았다.”라고 하였다.
환향하(還鄕河) 환향하는 풍윤(豊潤)과 옥전(玉田) 사이에 흐르는 강이다. 풍윤과 옥전 사이의 물줄기는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강만이 서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환향하(還鄕河)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편 원(元)나라로 끌려가던 송(宋)나라의 휘종(徽宗)이 다리를 건너며, “이곳을 지나면 큰 사막이 점점 가까워지니, 내 어찌 이 물과 같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요.”라고 하며 밥을 먹지도 않고 지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다리 이름을 ‘사향(思鄕)’이라고 하였다.
빈산(盤山) 반산은 반룡산(盤龍山)이라고도 하며, 계주성(薊州城) 25리 지점에 있다. 산 정상 부근에 큰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밀면 움직였다. 산 위에는 육룡담(六龍潭)이 있는데 비를 빌면 영검이 많고, 아래에는 조정(潮井) 및 용발천(龍鉢泉)이 있다. 강희제(康煕帝)ㆍ건륭제(乾隆帝)의 두 능이 산 아래에 있고, 이를 찾아보기 위해 황제가 오면 묵는 행궁(行宮)도 있다. 명나라의 문인 원굉도(袁宏道)가 지은 유기(遊記)가 있어, 김창업이나 이의현 같은 사람들은 가보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백하(白河) 백하는 수원이 변새(邊塞) 밖에서 나와, 선화부에서 순천부 경내로 들어오고, 천진(天津)에 와서 위하(衛河)와 합류한다. 그리고 밀운현(密雲縣)에서 우란산에 이르러 조하(潮河)와 합류하고, 통주(通州)에 이르러 직고(直沽)로 들어간다. 일명 백수하(白遂河)이다. 조선(漕船)이 모이는 곳이므로 또한 북운하(北運河)라고 한다. 또 통주강(通州江)ㆍ노하(潞河)라고도 하고, 북경 외곽에 있다 하여 외하(外河)라고도 한다. 모래 웅덩이가 많아 폭우가 내리면 모래가 쉽게 퇴적되었고, 가물어지면 수심이 얕아져서 배가 다니기 불편하였다. 그래서 얕은 여울 50여 곳을 준설하여 수심을 깊게 하여, 배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포구를 전후로 30여 리에 걸쳐 수천 척의 배가 정박하였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온 것은 물론 절강(浙江)이나 광동(廣東)의 중국 남쪽에서 온 상선(商船)까지 중국 전역의 배가 강에 가득하여, 배의 돛대들이 마치 만 그루의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은 것만 같았다고 한다. 조선 사행은 한강에서 가장 큰 삼강(三江) 나루와 비교하여 놀라워했고, 직접 배에 올라 중국 선박의 규모와 만듦새들을 꼼꼼하게 살펴보기도 했다. 다만 후대로 올수록 배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연행사들의 실망을 자아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