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 이야기관
공간
압록강(鴨綠江)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총 800km를 흘러 서해로 들어가며, 중국과 조선의 자연 국경을 이루고 있는 강이다.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강물 빛이 오리[鴨]의 머리[頭] 빛깔처럼 푸르다[綠]는 뜻의 ‘압두록(鴨頭綠)’을 줄여 ‘압록(鴨綠)’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마자수(馬訾水)나 청하(淸河)라고 하고, 광개토대왕비에서는 아리수(阿利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대총강(大總江)이라고 부른다. 옛날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땅이고, 부여(夫餘)의 남쪽 경계였다.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이 모두 그 안에 있었고, 나중에는 발해(渤海)에 속했다. 고려 때까지는 여진과 더불어 할거(割據)하다가, 조선에 이르러 강의 북쪽을 중국에 넘겨주면서 국경이 되었다.
금석산(金石山)은 정석산(頂石山), 해청산(海靑山)이라고도 하였는데, 황금색 돌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와 함께 “높고 웅장하며 마치 벽처럼 깎은 듯 솟아 있다.”고 설명하는 사람과 관악산이나 도봉산과도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종합하여 볼때, 제법 험준한 바위산 임을 알수 있다. 현재는 이와같은 지명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의 오룡산(五龍山)이 아닌가 짐작된다. 사행단이 도강 후 보통 구련성에서 첫날 밤을 묵으면, 그 다음날 새벽에 출발하면 금석산 아래에서 아침을 먹었다.
책문(柵門)은 변문(邊門)이라고 하는데 압록강과 130리가 떨어져 있다. ‘책(柵)’이란 한 길 반 길이의 나무를 늘어세운 것으로, 사람이나 말이 드나들 틈이 없고 나무를 가로대어 그 중간을 엮어 튼튼한 경계선이 되었다. 청나라는 봉황성으로부터 서쪽으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둘레 1,800여 리에 이르는 울타리를 쳤고, 그 중간에 총 17개의 문을 두었다. 그리고 각 문마다 지키는 관병을 두었고, 그 주위에 장정들을 선발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책문은 조선과 청나라의 실질적인 국경이었고, 그런만큼 일정한 통관 절차를 밟아야 했던 곳이었다. 연행사들은 역관을 보내 사신의 인적 사항와 인마(人馬)의 수 등을 적은 문서를 보냈고, 책문의 관리자인 봉성장(鳳城將)이 나와 인마를 점고하고 들여보냈다. 간혹 이 통관 절차를 엄격하게 할 때가 있어, 연행사들은 책문의 관리 책임자부터 말단의 호송 군조들에게까지 종이ㆍ부채ㆍ붓ㆍ담뱃대 등의 예물을 나누어 주었다.
봉황성(鳳凰城)은 봉황산(鳳凰山) 서쪽에 있는 성으로 지금의 봉성시(鳳城市)이다. 조선 쪽의 국경을 책임지는 도시로, 봉황성장이 주관하였다. 명나라의 지리서 『일통지(一統志)』에 따르면 발해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요나라 때에는 개주진국군(開州鎭國軍)이 설치되었고,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소속되었다. 명나라 때에 벽돌로 튼튼하게 성을 쌓았고,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조선과의 국경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현지인들은 조선을 숭상하여 사행에 따라온 의주 사람을 이웃 친지처럼 대하였다. 박지원이 여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벽돌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고려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 고려보는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다. 아골관(연산관)에도 조선에서 온 유민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있다.
십강자(十扛子)는 이도정(二道井)과 소흑산(小黑山) 사이에 있다. 박지원은 십강자에 이르러 요란한 음악소리에 의해 상가의 제도를 보게 되는데, 구경 좀 하려다가 조문객으로 오해를 받고 끌려들어간다.
통원보(通遠堡)는 명나라 때 진이보(鎭夷堡)라고 불렸던 곳이다. 후금(後金)이 청(淸)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황제로 즉위하던 해에 춘신사(春信使)로 갔던 나덕헌이 돌아오면서 국서(國書)를 버려두고 온 곳으로 유명했다. 엄연히 명나라와 사대의 관계에 있던 상황에서 ‘청나라 황제’를 용납할 수 없었기에 나덕헌은 조선으로 국서를 가져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일은 병자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박지원은 장마로 길이 막혀 통원보에서 여러 날 묵었다. 그는 벽돌 가마에서 관찰하면서 벽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온돌보다 난방이 뛰어난 캉[亢]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관(連山關)은 분수령(分水嶺)을 넘어 30리를 가면 이르는 곳으로, 동팔참 구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호랑이를 만나고, 사냥꾼들이 수시로 노루를 잡아오던 곳이다. 명나라 때에는 겹문을 설치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조사했다고 하는데, 청나라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여기에서 요양이나 심양을 거치지 않고 산해관으로 직접 가는 길이 있었는데, 명나라 때부터 조선인에게 군사시설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하여 이용이 금지되었다.
마천령(摩天嶺)은 일명 말굽고개[馬蹄嶺]라 이르는데, 높이가 작은 언덕만 하다. 또 두관참(頭關站)을 지나 큰 물을 다섯 번을 건너니, 이를 삼류하(三流河)라 한다. 또 탕하(蕩河)라 하니 동북으로 흘러 태자하(太子河)로 들어간다.
연행사들이 석문령(石門嶺)을 넘어서면 언덕 하나 없이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져 하늘에 닿은 요동벌이 눈에 들어온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살던 연행사들에게 요동벌은 하나의 시각적 충격이자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하는 장소였다. 특히 새로운 천체관을 육안으로 확인해주는 공간이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天圓地方]는 전통적인 천체관은 17세기 이후 지구는 둥글다[地球]는 과학적 천체관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연행사들은 요동벌에 와서 지평선에 닿은 하늘의 모양이 가마솥을 엎어놓은 듯한 것을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단서를 찾았다.
요양(遼陽)은 한나라 때에는 양평요양(襄平遼陽)으로 불리다가,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요동성(遼東城)이 되었고, 금나라 때에는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원나라에 이르러 요양현(遼陽縣)이 되었다. 고구려 이후 고려 공민왕(1330~1374)의 요동 정벌 시기에 잠시 고려의 판도에 들어왔다가, 다시 중국 땅이 되었다. 요양은 중국 사행 노정의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명나라 때에는 요양성 밖의 조선관(朝鮮館: 회원관 懷遠館)에서 하루밤을 묶고, 바로 서쪽으로 꺾어져 주필산(駐蹕山)과 해주위(海州衛)를 거쳐 곧장 광녕으로 갔다. 청나라가 되어서는 요양 시내에 들어서지 않고 태자하를 건너 영수사(映水寺)에서 묵고 심양으로 갔다. 요양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는 서문 밖에 있던 백탑(白塔)이었다. 8각에 13층, 높이는 70.5m인 백탑은 요동벌의 등대와 같은 존재였다.
원당사(願堂寺)에서 7리를 가면 탑교(塔橋)가 있다. 탑교에서 동으로 1리쯤 가면 탑원(塔院)이 있다. 그 원에는 백탑(白塔)이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서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은 입구(口)자처럼 4면을 건물로 두르고 가운데 정원을 만드는 중국 전통 사합원 양식으로 설계했다. 지붕은 청나라 궁궐을 흉내 내 황금색 유리기와를 올렸고, 지붕선의 끄트머리는 녹색으로 칠했다. 지금은 어린이 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세자가 머물렀던 세자관은 크게 두 기구로 구성되어 있다. 세자의 학문을 맡은 시강원(侍講院)과 일행의 안위를 책임지는 익위사(翊衛司)가 그것이다. 시강원에는 문관이, 익위사에는 무관이 속해있었다. 본국의 재상에 해당하는 재신(宰臣)이 문무 양쪽에 각각 있어 세자를 보필한다. 이밖에 두어 명의 선전관이 본국을 왕래하면서 서신을 전했고, 의관(醫官)은 일행의 건강을 돌보았다.
십리하(十里河)는 요양(遼陽)시와 선양(沈陽)시 중간에 있는 역으로 현재는 선양시에 속해 있다. 십리하(十里河)는 근원이 묘아령에서 나와 양가만에 이르러 사하(沙河)에 들어와 합류하고, 운하(運河)에 들어간다.
심양(瀋陽)을 요나라와 금나라는 심주(瀋州)라고 하였다. 원나라에 이르러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 하여, 심양(瀋陽)이라고 불렀다. 1634년에 후금의 지배층들이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뜻으로 ‘천권성경(天眷盛京)’으로 고쳐 불렀고, 1657년에 “하늘의 뜻을 받들어 운수를 잇다[奉天承運]”는 뜻을 가져와 심양성 안에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봉천이란 이름은 나중에 일제가 세운 만주국 시절에 잠깐 쓰였을뿐, 예나 지금이나 심양으로 불렸다. 청나라 때의 심양성은 또 하나의 수도라고 부르며, 모든 제도와 규모를 북경의 그것에 맞추었다. 그래서 그 규모와 화려함이 요양보다는 열 배나 더했으며, 북경에 버금갈 정도였다. 연행사들은 대남문(大南門) 근처에 있던 숙소 조선관에 짐을 풀고, 예단 가운데 일부를 봉천부에 납부하였다. 그간 사신들을 수행했던 의주(義州)의 군관(軍官)이 심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장계를 가지고 돌아갔다.
현재 북녕(北寧)으로 이름이 바뀐 광녕(廣寧)은 명나라 때부터 북방의 이민족을 감시하는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순무(巡撫)와 총병(摠兵)의 지휘 아래 대규모 군사가 주둔했던 곳으로, 성곽 위에는 창검과 깃발이 늘어서 있어 조선 사신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광녕성 한가운데에는 이성량(李性樑)의 패루(牌樓)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성량은 16세기 후반 요동 지역을 책임졌던 군인으로 그 할아버지는 죄를 짓고 압록강을 건너간 조선 사람이었다. 이성량의 아들은 이여송(李如松)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에서 왜적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패루는 문(門)처럼 생긴 석조 건축물로 용이나 호랑이 등이 문양을 정교하게 새기고, 공적을 기록하였다. 이성량이 오랑캐를 정벌한 공을 기려 세운 이 패루는 산해관 동쪽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여 사신들이 꼭 둘러보는 명물이었다. 광녕의 북쪽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의무려산의 신을 모신 북진묘(北鎭廟) 또한 조선 사신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십삼산(十三山)은 봉우리가 13개라서 붙은 이름이다. 보잘것없는 바위산이 줄지어 있을 뿐이지만, 그나마 연행길에 중요한 표지 역할을 했다. 가면서 보면 12봉우리지만 돌아올 때 보면 13봉우리라 한다. 십삼산에대한 다른 견해로는 원래 이름은 석산(石山)인데, 발음이 ‘십삼(十三)’과 비슷해서 와전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처럼 보이고, 가까이서 봐도 봉우리가 확연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사행단이 송산보(松山堡)에서 밥을 지어 먹고 주로 쌍양점(雙陽店)에 이르러 잠을 잤다. 무오연행록은 중국황제의 표문을 받고 떠나 쌍양점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하고 있는데, 무오연행록에서의 쌍양점은 마을 전체가 집집이 문을 닫고 길에 행인도 없으며, 죄인들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는 곳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교보(高橋堡)에서부터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는데, 넘쳐 흐를 듯하게 높다. 바다 남쪽이 곧 산동(山東)의 여러 읍들로 옛날의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의 땅이다. 동쪽은 우리나라 황해도 연안과 서로 통하니 숭정(崇禎) 이후에 명 나라로 들어가던 길이다. 고교보의 마을도 역시 번화하여 송산보(松山堡)와 서로 맞설 정도다.
정녀묘(貞女廟)는 들 가운데에 조그만 언덕이 불쑥 일어나서 산이 되었고, 산 위에는 바위가 있으며, 북쪽에는 큰 산이 있어 가로로 10여 리를 뻗어 나갔으며, 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어 사면이 틔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당을 만들었다. 사당 안에 허맹강의 소상(塑像)을 봉안했는데 그 앞에 두 동자(童子)가 모시고 서 있다. 왼쪽에 있는 자는 일산을 들었고, 오른쪽에 있는 자는 띠를 둘렀는데, 이들은 모두 정녀의 아들로 모양이 몹시 단정하고 엄숙했다. 일산은 행구(行具)를 상징하는 것이요, 띠는 그 남편이 평상시에 입던 옷을 상징하는 것으로 모두 그 여자가 가지고 온 물건이다.
만리장성을 따라 다시 15리를 가서 남으로 바다에 들어서 쇠를 녹여 터를 닦아 성을 쌓고는 그 위에 삼첨(三簷) 큰 다락을 세워서 ‘망해정(望海亭)’이라 하니, 이는 모두 서중산(徐中山: 서달의 봉호)이 쌓은 것이다.
영원위(寧遠衛)의 인가와 시가는 심양만큼 번성하지는 못했다. 영원위에는 동치미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동치미 맛과 매우 비슷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정축년(인조15년, 1637)에 포로로 간 우리나라 사람이 남긴 방법이라 하는데, 실제 맛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곳은 귤ㆍ유자ㆍ포도를 많이 파는데 그 알이 매우 크고 맛이 달아서 새로 딴 것 같다고 한다.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요야사(拗爺寺)는 요야산(拗爺山) 서쪽 기슭에 있는 큰 절이다.
영평부(永平府)는 무령현(撫寧縣)과 사하역(沙河驛) 사이에 있다. 중심부에 영평성이 있는데, 지형은 평양(平壤)과 건축 형태는 심양성과 비슷하였다. 한(漢)나라 때는 우북평(右北平), 당나라 때는 노룡새(老龍塞)라 하는 중국의 변경 도시였다. 그러나 이후 북방 유목민족들이 정권을 세우면서 도읍지의 근교가 되면서 민가와 점포들이 많아졌다. 더불어 사대부들도 늘어났다고 한다. 성의 중앙에 향시를 보는 시원(試院)이 있었고, 그 곁에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조선 사신들의 숙소가 있었다. 본래 봉성에서부터 서쪽으로 주부(州府)와 공참(公站)마다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찰원(察院)이 있어 조선 사신의 숙소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1년에 몇 번 사용하지 않아 관리가 소홀해지자 건물이 허름해졌고, 사행은 시설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개인 집을 빌어 숙소로 삼았다. 이 때문에 찰원이 모두 폐쇄되었다. 그러다가 심양에 오던 건륭제가 영평부에 이르러 조선관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수령을 파직하면서 다시 찰원을 수리하였다. 조선 사신들이 오면 관가에서 자진하여 탁자나 그릇을 준비해서 대접했는데, 19세기 이후 다시 문을 닫았다.
요야산(拗爺山)은 진자점(榛子店) 전에 있는 산이다.
옥전(玉田)은 옛 이름이 유주(幽州)요, 무종국(無終國)이 이에 있었는데 곧 소공(召公)의 봉지(封地)이다.
고려보(高麗堡)는 풍윤을 지나 옥전현 못 미쳐 있는 마을이다. 병자호란 때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고려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거의 100여 호가 모여 살았는데, 조선의 사행들이 이곳을 지나며 주민들에게 조상과 집안을 캐묻는 일이 많아졌고, 주민들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기를 피하였다. 주민들은 오랑캐에게 잡혀온 것이 부끄럽고,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만 같아 사행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그 숫자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고려보 부근에는 상당한 넓이의 논이 있어 벼농사를 지었다. 시장에 밤절편[栗切餅], 송편[松餅] 따위가 있어 사람들이 고려떡이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 떡장수들이 조선의 떡을 본 따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향 생각이 절실하던 사행은 떡을 많이 사 먹으므로, 주민들이 떡함지를 들고 나와 팔기도 하고 그냥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후대에 오면서 공짜를 바라는 사행의 하인들과 조선에 대한 향수가 점점 사라지는 주민들 사이에 다툼이 생겨 서로 원수가 되었다고 한다.
독락사는 계주성(薊州城) 안에 있다. 2층의 큰 누각이 우뚝 서 있는데 멀리 바라보니 금자로 ‘관음지각(觀音之閣)’이라 쓴 현판이 있다. 그 끝에다 ‘태백(太白)’이라는 두 글자를 써 놓았으나, 실은 이태백(李太白)이 쓴 것은 아니라 한다. 절 안에 있는 입불(立佛)은 높이가 10여 장 쯤 되고 머리에는 10각형으로 만든 장대한 불우(佛宇)를 이고 있는데, 만듦새가 매우 크고 화려하여 볼 만하다. 그 전후 좌우로 서 있는 불상과 신상(神像)은 그 수를 다 기록할 수 없다. 독락사는 와불이 있으므로 또한 와불사라고도 하는데, 사내에 영통안약(翎筩眼藥)을 매매하는 자가 있는데 쓰면 효험이 있다 한다.
옥전현(玉田縣)은 옛날 유주(幽州) 땅으로 무종산(無終山)과 연나라 소왕(昭王)의 묘가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호질(虎叱)」 창작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박지원은 당시의 정계나 도학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호질」을 자신의 창작이라고 하지 않고, 옥전의 심유붕(沈由朋)의 집에 걸려있는 족자를 베껴온 것이라고 하였다. 심유붕 역시 그 족자를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계주(薊州)의 시장에서 사다 벽에 걸었다고 이야기하였다.
계주(薊州)는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어양군(漁陽郡)으로,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킨 곳으로 유명하다. 성 안에 있는 독락사(獨樂寺)는 당(唐)나라 때 건축했으나 요(遼)나라 때 중건해서 현재 요나라 3대 사원의 하나로 꼽는 절이다. 관음각 안의 아홉 길의 금불과 와불(臥佛)로도 유명하다. 또한 성 안에 있는 어양교(漁陽橋)의 좌우로 양귀비(楊貴妃)와 안록산의 사당이 마주하고 있었다. 조선 사행들은 대개 당나라를 그르친 두 인물을 위한 사당을 짓고 명복을 비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연교보(燕郊堡)는 연교성(燕郊城) 동문과 서문에 편액이 있으니, 서쪽에는 ‘연교거진(燕郊巨鎭)’이라 쓰고, 동쪽에는 ‘천하문명(天下文明)’이라 썼다. 시가와 촌락이 또한 번화하다. 연교(燕郊)에 성이 있는데, 동문 편액에 ‘천하문명(天下文明)’이라 씌어 있고, 서문에는 ‘연교거진(燕郊巨鎭)’이라 씌어 있다. 점방들이 매우 많다.
남소관(南小館)은 조선 사신들이 쓰던 옥하관을 러시아인들이 차지하고 나가지 않아 별도로 설치한 관사이다. 옥하교의 남쪽이 있다 하여 남소관이라 한다. 우리 사신 일행이 사관하는 곳으로 청국 사람들은 사이관(四夷館)이라 말한다.
자금성(紫禁城)은 명ㆍ청대(明淸代)의 궁성(宮城)이다. 궁성(宮城)은 도성의 반을 차지하고, 둘레는 18리, 높이는 5장 남짓하다. 성은 담 쌓는 제도와 같으나 내성ㆍ외성 모두 붉은 칠을 하고 누런 기와로 덮었으니, 자금성으로 명명된 것이 이 때문이다. 4문이 있으니, 남은 대청(大淸), 동은 동안(東安), 서는 서안(西安), 북은 지안(地安)이다. 대청문은 정양문(正陽門)과 마주 섰는데 그 사이가 겨우 200보이고, 그 안에 천안문(天安門)이 있으니 또한 궁성 남문에 소속된다. 동안문ㆍ서안문 안에 여염집과 가게가 즐비하게 잇닿아 있다. 성의 네 귀퉁이에는 모두 채루(彩樓)가 있는데 높이는 100척쯤 됨직하고, 규모가 극히 기이하고 아름답다. 천안문 안으로는 단문(端門)이 그다음이고 오문(午門)이 또 그다음이다. 오문은 곧 내궁성의 정남문이니, 동은 동화(東華), 서는 서화(西華), 북은 신무(神武)이다. 오문을 지나면 태화문(太和門)이 있다.
홍대용과 박지원 등의 연행록에는 이들이 방문한 곳이 서천주당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남천주당(南天主堂)이다. 천주당(天主堂)은 곧 서양 사람의 관소로, 남서쪽에 위치한 선무문(宣武門) 내에 있다. 건륭(乾隆) 때에 ‘통미가경당(通微佳境堂)’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남천주당은 현존 건물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교당으로, 명(明) 만력(萬歷) 33년(1605)에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웠다. 청 건륭제(乾隆) 40년(1775)에 불탔으나 다음에 중건됐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신부가 활동했던 곳이며, 소현세자와 교류하였던 아담 샬(Adam Schall)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옥하관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 사신들은 예수회 소속 서양 신부들과 접촉하기에 용이하였다. 이들 천주당 신부들과의 만남은 조선에 서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당은 김창업의 『연행일기(燕行日記)』 이후 연경을 방문하는 사신들이 반드시 들리는 명소가 되었다. 홍대용은 1766년 1월 9일 남천주당(南天主堂)을 방문하여 당시 남천주당의 선교사였던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포우관(鮑友官, Anton Gogeisl)을 만난다. 그는 모두 네 차례 천주당을 방문하였는데, 천주당에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고, 생전 처음 보는 파이프 오르간의 제도를 살피고 연주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연행에 오른 박지원 역시 천주당을 찾은 감격을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술회한다. 천주당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을 듯 하는 그 무엇이 있었”고,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저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내고 있었다.”고 하여 서양의 화법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실학자들은 천주당을 찾아 서학을 접하면서 그 사유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남당은 중국식 불교 사원과 유럽식의 건축 양식이 융합되어진 성당이다.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대성당과 비슷한 반원 아치형의 로마네스크양식이며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고 전체적으로 암회색의 벽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고졸하고 소박함을 더해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북경성에는 모두 12개의 대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내성의 남문이 바로 정양문이며 일반적으로 쳰먼(前門)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성벽도 없이 문만 남아있다. 과거 베이징의 내성(황성皇城)에는 9개의 성문을 통해 일반인의 주거지와 내성 중심부가 통했는데 이 쳰먼이 바로 그 남쪽 출입문이었다. 명ㆍ청시대에는 황제만 이 곳을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궈먼(国門) 또는 쳰먼(前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양문은 1421년(명나라 영락(永乐) 19) 처음 건립됐는데 정통 원년인 1436년 천안문에 버금가는 크기로 증축된 이후 옛 베이징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건물이 됐다. 이후 정양문은 몇 번의 화재와 전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신중국 성립 직후 철거된 나머지 8개 출입문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베이징의 대표적 건출물로 자리하고 있다.
원명원(圓明園)은 청나라시기에 조성된 황실의 별궁이다. 그 아름다움과 규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원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웅장함과 예술적 가치를 갖는 행궁이었다. 황제가 북경에 머무는 기간의 대부분은 원명원에서 지냈는데, 이로 인해 원명원은 청 제국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은 청나라와 맺어진 특수한 관계로 인해 많은 사절단들이 청을 방문하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원명원은 조선과 청 두 나라간의 정치 외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매년 정원대보름날인 원소절(元宵節)이 되면 황제는 원명원에서 경축행사를 열었으며, 조선 사신들은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였다.
자금성 동남 모퉁이에 위치한 흠천감(欽天監) 앞에 보이는 높은 대(臺)를 관상대(觀象臺)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관상대에 오르는 일은 금지되었는데, 성을 의지해서 높이 쌓았으므로 궁궐을 엿볼 수 있고, 또 대부분의 의기(儀器)가 귀중한 보물들이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보면, 관상대 위에는 여러 가지 관측하는 기계들이 놓였는데, 멀리서 보면 큰 물레바퀴 같았다고 한다. 이 관측기구를 이용하여 일월(日月)ㆍ성신(星辰)과 풍운(風雲)ㆍ기색(氣色)의 변화하는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 관상대 아래에는 흠천감(欽天監)이 있어, 천체와 기후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 그 정당(正堂)에는 ‘관찰유근(觀察惟勤)’이라고 쓴 현판이 붙어 있다.
뜰에는 청동으로 만든 혼상(渾象)과 간의(簡儀) 등의 천문 관측기구가 놓여 있다. 크기는 모두 대여섯 뼘쯤 되고 네 둘레에는 돌난간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또한 강희(康熙) 연간에 만든 6의(儀)가 있는데, 천체의(天體儀), 적도의(赤道儀), 황도의(黃道儀), 지평경의(地平經儀), 지평위의(地平緯儀), 기한의(紀限儀)이다. 그 제도는 모두 서양(西洋)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정밀하고 교묘하다.
관상대 위에 진열한 기계들은 혼천의(渾天儀)와 선기옥형(璿璣玉衡) 등의 천문 기구이다. 박지원은 흠천관에서 본 기구들이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의 집에서 본 물건과 같았다고 했는데, 일찍이 정철조는 대나무를 깎아 천문 기구들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담헌 홍대용은 그의 『연기(燕記)』에서 이른 아침 관상대에 올라 여러 천문 기기들을 구경한 일과 관성대(觀星臺)에서 혼의(渾儀)와 망원경(望遠鏡) 등을 본 일을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때에는 우리 사신이 북경에 이르면 예부(禮部) 근처에 있는 여관에서 묵고 있었는데, 순치(順治) 초년부터 관(館)을 새로 짓고 우리 사신들을 거처하게 했다. 그 관이 옥하(玉河)의 곁에 있기 때문에 옥하관(玉河館)이라 하고, 혹은 남관(南館)이라고도 하였다. 건륭 임진년(1772, 영조 48)에 ‘회동관(會同館)’이라 사명(賜名)하고 관문에 회동 사역관(會同四譯館)이라고 편액했다. 그러다가 러시아[鄂羅斯] 사람들에게 점령되자, 정양문 안 동성(東城) 밑 건어호동(乾魚衚衕)에 관을 마련하고 이름을 서관(西館)이라 하여, 우리 사신을 옮겨 묶게 하였다. 서관은 한림서길사원(翰林庶吉士院)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옥하관보다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이 다시 그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우리 사행은 다시 옥하관에 관사를 정하게 되었다. 지금의 동교민항 호텔자리이다.
이 관은 대개 네 겹으로 되어 있다. 제일 첫 집은 곧 마루[廳事]로서 세 사신이 아문(衙門)의 여러 관원들과 공적인 예로 만날 적에 모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세폐(歲幣)ㆍ방물(方物) 등을 저장하는 곳으로 쓰였다. 두 번째 집은 정사(正使)가 거처하고, 셋째 집은 부사(副使)가 거처하고, 넷째 집은 서장관(書狀官)이 거처하였다. 집마다 다 건넌방과 좌우의 익랑(翼廊)이 있어, 반당(伴倘: 중국에 가던 사신이 자비(自費)로 데리고 가던 종자)과 비역(裨譯)들에게 나누어 주어 거처하게 하였다. 문밖에는 평상을 걸쳐서 마루를 만들어 오르고 내리는데 편리하게 하고, 마루 밑에는 자그마한 삿자리 방을 만들어서 마두들이 거처하며 부름을 기다리게 했다. 일행의 쇄마(刷馬)와 역마(驛馬)는 모두 삿자리 집 밖의 노천에 있었다. 관문(館門)은 세 사신이 출입하는 때가 아니면 늘 닫아 두고, 동쪽에 협문(夾門)이 하나 있어 일행의 여러 사람들은 거기로 다녔다고 한다. 조선의 연행사들은 옥하관의 이 동쪽 협문을 나와서 유리창 등 북경의 번화한 거리와 고적을 돌아보고, 수많은 중국의 명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신원지략(宸垣識略)』에는 “옥하교는 동안가(東安街)에 있는 것을 북옥하교(北玉河橋), 동강미항구(東江米巷口)에 있는 것을 중옥하교(中玉河橋), 동성근(東城根)에 있는 것을 남옥하교(南玉河橋)라 한다. 사이관(四夷館)은 미항(米巷)에 있으며, 지금 고려인(高麗人)의 관사는 동성근에 있으니 곧 사이관의 별관이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동천주당(東天主堂)에 관한 기록은 홍대용의 『연기(燕記)』에 소상하다. 동천주당은 몽고관(蒙古館)에서 북옥하교(北玉河橋)를 지나 자금성(紫禁城)을 따라 가다가 보이는 기이한 기와 지붕을 인 서양식 집이다. 지금의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 74호에 있다. 북경 4대 천주교당 가운데 하나인 동천주당은 명말 2명의 선교사가 세웠으며, 청조가 북경에 들어올 때 훼손됐다가 순치(順治) 12년(1655)에 이 땅을 하사했다. 이때 남당과 같이 건립됐지만 가경(嘉慶) 12년(1807년)에 화재로 폐허가 됐는데, 1884년에 로마식으로 다시 건립됐다. 의화단의 난 때 다시 불탔으나, 1904년 배상 형식으로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공동으로 중건했다.
천주당을 방문한 연행사들은 원근법을 이용한 서양 그림의 사실적인 화법에 감탄하곤 한다. 홍대용은 북쪽 벽에 그려진 천주(天主)의 화상(畵像)이 모발이 무성하여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여, 원근법을 사용한 서양 그림의 입체감에 탄복하였다.
동천주당 서쪽에는 자명종루(自鳴鐘樓)가 있고, 누각 아래에는 해시계[日晷石] 한 쌍이 있다. 서쪽으로 난 문밖으로 두어 길 되는 대(臺)가 있었는데, 이를 관성대(觀星臺)라 하였다. 대 위에는 집 셋을 세워 놓았고, 가운데 집에 혼의(渾儀)ㆍ망원경 등 여러 가지 의기들을 저장하여 두었다.
대 아래 넓이가 수십 묘(畝) 되는 뜰에는 벽돌을 쌓아 길이가 1장쯤 되는 기둥을 만들어 두었는데, 위에는 열십자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런 것이 무려 수백 개가 뜰에 널려 있었으니, 대개 봄여름에는 위로 포도 덩굴이 올라가도록 횃대를 놓아 둔 것이다. 기둥 옆에 군데군데 무덤처럼 흙을 모아 둔 것은 포도를 저장하는 곳이다.
뜰 동쪽에 집이 두어 칸 서 있고 가운데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위에 두레박틀을 만들어 두었고, 옆에는 치목(齒木)을 가로질러서 톱니바퀴가 맷돌처럼 고르게 돌아가게 하였다. 벽에는 버드나무 물통이 수십 개나 매달려 있었다. 또한 봄여름에 물을 길어 포도에 대는데, 기계 바퀴가 한 번 돌면 수십 개의 두레박이 차례차례로 물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사람이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물은 도랑에 고루 퍼져 뜰에 가득 차게 된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포도를 힘들여 가꾸는 것은 술을 빚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명나라 시기에 외국의 사절단을 접대하는 전문 관사로 회동관을 두었는데 이 회동관은 현재 북경의 왕부정 거리 동단 삼조호동(三條胡同)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명나라 시기에 이용되었던 회동관은 여러 나라 사절단들이 모두 머무는 곳으로 조선의 전문사관은 아니었다. 회동관의 대문 안은 방물(方物)을 보관하는 벽돌 대청이고, 그 안은 정사의 하처이며 또 그 안은 부사의 하처이고 또 그 안은 서장관의 하처이며, 또 북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주방과 닿아 있다. 또 마방(馬房)은 관 밖의 성 밑에 있으며, 방료 군관(放料軍官)이 역마와 구인(驅人)들을 데리고 함께 있는 곳이다. 상방과 부방의 서자(書者)들은 홍화점에서 먼저 떠나서 사행단이 도착하기 전 6일에 관소에 도착해서 여러 온돌방들을 수리한다. 관문 밖 좌우의 몇 백 호 문미의 판대기에 ‘천태 인삼국(天泰人蔘局)’이니 ‘광성 인삼국(廣盛人蔘局)’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 놓아 물건을 교역할 수 있도록 표시를 해두는데, 인삼이 우리나라 물건 중 제일 귀중하므로 인삼만 표시해도 다른 것들이 다 포함된다 여겼다.
관왕묘(關王廟)는 마을마다 거의 있는 관운장을 받드는 곳이다. 관왕묘를 숭봉하는 것은 과거부터 그러했었지만 현재 청(淸) 나라에서는 이를 더욱 조심스럽게 한다. 시골 마을과 성읍(城邑)에 관왕묘가 없는 곳이 없는데, 그 규모와 사치롭고 검소한 정도는 그곳의 대소 내지 빈부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편패(扁牌) 주련(柱聯) 같은 것은 애써 신기한 것을 숭상한다. 심지어는 집집마다 관제(關帝)의 상을 받들고 조석으로 분향 기도하며 시장 전방들도 그렇게 한다.
악라사관(鄂羅斯館)은 옥하관 뒷거리인 건어호동(乾魚衚衕) 반 리쯤 못 가서 있다. 악라사는 혹 아라사(阿羅斯)라 일컫기도 하고, 혹 아라시(俄羅嘶)라 일컫기도 한다. 악라사는 또한 대비달자국(大鼻韃子國)이라 한다. 이는 몽고족을 달자(韃子)라고 하여 몽고 서쪽에 있는 코 큰 인종의 나라라는 뜻에서 그리 부른다. 악라사는 흑룡강 북쪽에 있다. 그 나라는 지역이 매우 커서 동서가 3만여 리, 남북이 2만여 리가 된다. 동남쪽에는 유구와 안남(安南)이 접해 있고, 동북쪽에는 몽고가 접해 있고, 서남쪽에는 크고 작은 서양(西洋)이 접해 있다. 서쪽으로 통하는 사막의 바깥은 몇 만 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며, 동쪽으로 중국과의 거리는 5만 리가 된다 하였다. 악라사는 중국과 통상하지만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조공도 바치지 않는다. 사신들이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가보면 관 안에는 만주와 중국 책이 있고, 악라 글자로 번역하여 작은 글자로 베껴 쓴 것이 있는데 범서(梵書)같다. 탁자 위에 자명종이 있는데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융복사(隆福寺)는 인수방(仁壽坊) 동쪽 사패루(四牌樓) 마시(馬市) 북쪽에 있는데, 명(明) 나라 경태(景泰) 때에 남문 안의 상봉전(翔鳳殿) 목석(木石)을 거두어다 지었고, 옹정(雍正) 때에 중수(重修)하여 라마승(喇嘛僧)을 살도록 하였다. 절 가운데에서는 으레 한 달에 세 번씩 장을 여는데, 8일부터 시작해서 10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철시한다. 절 가운데에 전각이 첩첩이 들어박이고 불상이 화려하게 베풀어져 있었다. 전후 좌우엔 물건을 반드시 종류별로 구분해서 각각 벌여 놓았는데, 서책(書冊)은 동쪽에, 주옥(珠玉)은 서쪽에 벌여 놓았다.
태화전 동각과 서각에 좌익문(左翼門)ㆍ우익문(右翼門)이 있다. 좌익문 밖에 문연각(文淵閣)이 있고 우익문 밖에는 무연각(武淵閣)이 있다. 문연각의 오른쪽을 따라 높은 담이 둘러 있고, 담의 동쪽 모퉁이에 문 하나가 있으며, 여기를 지나면 경운문(景運門)이다.
통주는 인가와 시장이 매우 번화하다. 남방의 상선들이 이 곳에 오는데 보면 배 안의 기물들이 정하고 화려하며 서화와 꽃, 대나무까지 있다고 한다. 통주에서부터 사토(沙土)가 많아 강물이 ‘사하(沙河)’란 명칭이 많다. 이 통주에서 역관 홍순언이 청루에서 한 여인을 만나 그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가엽게 여겨 천은 300냥을 내주고 구해준다. 훗날 그 여인이 석성의 첩이 되어 홍순언이 종계변무를 성사시키는데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 관할의 하산(下山)이라는 섬이다.
소흥부(紹興府)는 곧 월왕(越王 구천 句踐)의 옛 도읍인데, 진(秦), 한(漢) 시대에는 회계군(會稽郡)이 되어 절동(浙東)의 하류에 있었고, 부치(府治 부청 府廳)와 회계현ㆍ산음현 두 현 및 소흥위의 치소(治所)인 와룡산(臥龍山)은 모두 성안에 있다. 회계산(會稽山)은 성 동쪽 10여 리에 있고, 그 밖에 진망산(秦望山) 등과 같은 높은 산들은 겹겹이 험준하여 천암 만학(千巖萬壑)이 동, 서, 남의 3방에서 뛰어난 경치를 서로 다투고 있었으며, 북쪽은 큰 바다에 연해서 평탄하고 넓으며 구릉은 없다.
북경은 옛 연나라 때의 수도였으며, 금나라 때에는 연경(燕京), 원나라 때에는 대도(大都)라 불렸다. 명나라가 건국된 뒤에 수도가 남경(南京)에서 여기로 옮겨오면서 북경(北京)이라 불렸고, 청나라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수도였다. 황제가 살고 있다 하여 황경(皇京), 제경(帝京), 경사(京師)라고 불렸다. 조선 사신은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면서 공물을 바치고, 외교 관계를 맡고 있는 예부(禮部)를 비롯한 해당 관청에서 현안을 논의하는 등 공식 일정을 수행하였다. 사신들은 공식 일정이 없는 날에는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거나 때에 따라서는 북경 시내를 구경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관리와 문인(文人), 시정의 상인(商人),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하였다. 또한 중국 정부를 통해 받거나 유리창(遊離廠) 등의 서점에서 직접 구입한 서적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자양분을 이루었다. 사신을 수행한 역관과 상인들은 숙소에서 시장을 열어 국제무역의 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희정당(熙政堂)은 떠나기 전에는 임금께 인사를 올리고, 임금께서 사행단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을 받는 곳이다. 또한 사행을 무사히 마치고 와서는 다녀온 소견을 말씀드리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다.
절강성(浙江省) 은 원래 춘추시대 월국이 세워졌던 곳으로 상해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절강성이라는 이름은 명, 청대에 이르러 붙여진 것이다. 사계절이 분명하고, 강수량이 풍부해서 예부터 어미지향(魚米之鄉-물고기와 쌀이 풍부한 고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항주는 절강성의 성도(省都)이다. 용정차와 뽕의 재배로 유명하고, 13세기 무렵 이탈리아의 유명한 여행가 마르코폴로가 이곳에 들렀다가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항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칭했다고 한다.
사행단은 떠나기 전에 서울에 와서 호조(戶曹)에 나아가 봉물인 세폐를 포장하고, 삼사가 모여 국서를 점검하는 사대(査對)를 행한다. 사대란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表文)과 6부에 바치는 자문(咨文)을 살펴 틀린 글자가 있는지 나중에 외교적인 문제가 될 표현은 없는지 확인하는 일로, 서울에서 떠나기 전에 3번, 도중에 3번을 할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다. 사대에는 의정부의 세 정승과 육조의 판서, 애초에 문서를 만들었던 승문원(承文院)의 제조가 참여하여 꼼꼼하게 살핀다. 떠나기 전에 삼사가 대궐에 나가 왕을 하직하는 숙배(肅拜)를 행한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삼사를 맞은 임금은 무사히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사행단에게 필요한 선물을 내린다.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다시 사대를 행하고, 홍제원(弘濟院)에 이르자 호조에서 작별의 연회를 베푼다. 배웅 나온 친척들과 예전에 근무하던 관청의 하급자들과 일일이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