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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행 문화교류

과학

망원경, 총포, 자명종을 들여오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서양 과학 수용은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정두원(鄭斗源) 등이 천리경(千里鏡)ㆍ화포(火砲)ㆍ자명종(自鳴鐘) 등을 들여오고, 포르투갈 출신의 신부 J. 로드리게스(Johannes Rodriquez, 육약한: 陸若漢)로부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이마두: 利瑪竇)의 천문서(天文書)와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 『천문도(天門圖)』 등의 서적을 얻어 가지고 돌아온 것을 든다. 이 당시에 들여온 것중 가장 중요한 서양 문물을 꼽으라면 망원경, 서양식 총포, 자명종 등을 들 수 있다.

아담 샬에게 서양 문물을 얻어 온 소현세자

이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북경에 있던 독일 출신의 서양 선교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탕약망: 湯若望)로부터 여러 가지 서양 문물을 얻어 가지고 귀국했다. 인조의 맏아들인 그는 1625년(인조 3) 세자에 책봉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그러다가 명이 망하고 청이 북경을 차지한 1644년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아담 샬과의 친교로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지식을 배워 천문ㆍ수학ㆍ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ㆍ천주산(天主像)을 들여왔다.

국내에 유입되었던 서양 천문학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이미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가 조선에 들어와 있었다. 이수광은 명나라를 수차례 방문하여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천주실의(天主實義)』등을 가지고 들어와 1614년(광해군 6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하여 한국에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등 실학 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수많은 조선 사신들이 중국을 방문했고, 그들에 의해 상당한 분량의 서양 과학 내용이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실용적인 분야에 특히 큰 관심을 끌어 비교적 일찍 수용된 서양 과학 분야로는 서양 천문학을 들 수 있다. 소현세자 등의 귀국과 더불어 조선에도 역법개정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1644년(인조 22) 관상감 제조 김육(金堉)은 시헌력을 채용하자면서, 청나라에서 시헌력에 관한 서적을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 중국 흠천감의 실제적인 협조를 얻는 것은 당시로는 불가능했으므로, 조선에서는 천문학자 김상범(金尙范) 등을 사신 가는 편에 북경에 파견하여 정보를 얻고 연구하게 하여 1653년(효종 4)부터 국내에서도 이를 시행했다.

자명종에는 깊은 관심이 없었던 조선

청나라에서 들여온 자명종

세종대의 『칠정산(七政算)』은 이미 수백 년이 지나 정확한 계산이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에서 새로 나온 서양식 역법을 채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헌력 말고는 서양 과학문물 가운데 조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웃 중국에서는 자명종이 깊은 관심 속에 수없이 많이 수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자를 양성하여 서양식 자명종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른다. 또 일본에서도 서양의 자명종은 제작 기술을 자극하여 이것이 일본에 소위 화(和) 시계를 크게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서양의 자명종이 그리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효종 시대에 밀양의 유흥발이 일본인에게서 얻은 자명종을 연구하여 그 이치를 스스로 터득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그 밖에도 여러 실학자들이 자명종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조선의 경우 중국, 일본과는 달리 자명종(서양식 시계)을 받아들여 비슷한 것 또는 같은 것을 제작하려는 노력을 조직적으로 하지는 않은 듯하다.

서양 과학에 대한 일부 실학자의 관심과 이해

이런 문화와 지적 환경 속에서 일부 실학자 등이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사상에 전환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이 그러하다. 그 가운데 홍대용은 그의 연행록인 『연기(燕記)』를 통해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보이는 한편, 서양 과학을 받아들여 전혀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전개하였다.

남천주당에 방문해 망원경을 구경한 홍대용

천리경

홍대용의 『연기』 가운데 주목할 것으로 북경 남천주당에서 서양 신부들과 필담한 유포문답(劉鮑問答)이다. 유(劉)는 유송령(劉松齡)이요 포(鮑)는 포우관(鮑友官)이니, 모두 독일인이다.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와 탕약망(湯若望: 아담 샬)의 뒤를 이어 중국에 천주교(天主敎)를 전하러 온 선교사들로, 천문(天文)ㆍ역상(曆象)에 정통하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흠천감(欽天監)으로 등용하였다. 유송령의 본명은 Augustinus von Halberstein이고, 포우관의 본명은 Antonius Gogeisl이다. 중국에 온 지 이미 26년이 되어 유(劉)는 62세가 되고 포(鮑)는 64세가 되었다. 모두 중국어문에 능통하였다. 유송령과 포우관은 남당(南堂)에 거처했는데, 이곳은 산학(算學)이 더욱 뛰어났고, 궁실과 기용은 4당중에서 으뜸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이 항상 왕래하는 곳이었다. 연행에 참여한 첨지(僉知) 이덕성(李德星)은 일관(日官)이어서 역법(曆法)을 대략 알았다.

이번 연행에서는 조정의 명령으로, 두 사람(유송령ㆍ포우관)에게 오성(五 星)의 행도(行度)를 묻고, 겸하여 역법의 미묘한 뜻을 질문하며, 또 천문을 관찰하는 모든 기구를 구매하려 하였다. 홍대용은 그와 함께 일을 하기로 약속하고, 유송령과 포우관을 직접 만나 천문에 관한 문답을 하고 관측기구를 구경하였다.

서양 과학에 대한 관심을 토론한 박지원

홍대용에 이어 연행에 오른 박지원 역시 서양의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인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는 그런 박지원의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박지원은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ㆍ기풍액(奇豐額)ㆍ왕민호(王民皥)ㆍ학성(郝成) 등과 함께 동중(東中) 두 나라의 문물(文物)ㆍ제도(制度)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이내 월세계(月世界)ㆍ지전(地轉) 등의 설을 토론했다. 당시 태서(泰西)의 학자 중에 지구(地球)의 설을 말한 이는 있었으나 지전에 대한 설은 없었는데, 대곡(大谷) 김석문(金錫文)에 이르러서 비로소 삼환부공(三丸浮空)의 설을 주장하였으며, 박지원은 그의 지우(摯友) 홍대용과 함께 대곡의 설을 부연하여 지전의 설을 주창하였던 것이었고, 그 말단(末段)에는 또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와 함께 목축(牧畜)에 대한 논평을 삽입하였으니,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