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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대 중국 외교

대청관계
대청관계

대청관계

주변국과 조공 관계를 맺은 청나라 청나라는 명나라를 승계하기는 했지만 통치구조가 달라 외교관계까지 그대로 가져가지 않았다. 중국 최대의 판도를 이루었던 18세기 후반의 기본틀은 다음과 같다. 만주와 중국 본토와 대만은 직할령으로 직접 다스렸고, 내몽골ㆍ외몽골ㆍ청해(淸海)ㆍ티벳과 천산남ㆍ북로(天山南北路)는 번부(藩部)라고 하여 간접 통치 구역으로 삼았는데,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군사적으로는 직접 통제하였다. 그밖에 조선ㆍ오끼나와(琉球)ㆍ베트남(安南)ㆍ미얀마(緬甸)ㆍ타이(暹羅)ㆍ잉글랜드(英吉利)ㆍ러시아(俄羅斯)ㆍ서양(西洋) 등은 번속(藩屬)이라 하여 일정한 조공 관계를 맺는 나라로 삼았다.

강력한 조공관계를 맺게 된 조선과 청나라 여타의 번속 가운데 조선은 청나라와 가장 강력한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쟁을 통해서 외교관계의 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에게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교린의 한 대상에 불과했고, 청나라에게 조선은 자신들의 발상지이자 일이 잘못되면 돌아갈 만주(滿洲)에 인접한 잠재적인 위협세력이었다. 청나라는 1627년과 1636년의 두 차례 침공으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끊고, 1637년 조선과 확실한 조공관계를 수립했다. 여진족의 중국 지배가 성립되는 1644년까지 인질ㆍ원군 파병ㆍ포로 송환ㆍ통혼(通婚)ㆍ세폐 등 청나라의 위압적 태도는 계속되었다. 1645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의 인질이 돌아오고, 중국의 남부를 소란하게 했던 삼번(三藩)의 난이 진압되는 등 체제의 불안요소가 사라지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도 점차 안정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하기 시작한 조선 청나라를 쳐서 병자년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北伐) 논의,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가 청국의 공한지(空閑地)에서 경작ㆍ채벌을 하는 범월(犯越) 문제, 북방의 영토선을 확정 짓는 백두산(白頭山) 정계 등 우호 관계를 위협하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오면 양국 관계는 안정되고 조선의 지식인들도 청나라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사행 참여 인원의 견문(見聞) 기록과 서장관과 역과의 보고서[別單]를 통해 중국의 국내사정, 황제에 대한 관심, 황실 내부 사정, 민심의 동향, 지식인들과의 교류 등등이 자세하게 전해진다. 일군의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개항으로 사라진 사행 19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면 조선과 청나라의 전통적 종속관계는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의해 심대하게 위협받았다.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면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야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조선이 개항(1876)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사행은 종말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