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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행 박물관>사행 경로>사행 노정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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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 경로

사행 노정 변천

1409년(태종 9)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의 명으로 바닷길에서 육로로 사행로가 변경되었다.

압록강(鴨綠江)→진강성(鎭江城)→탕참(湯站)→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 설류참薛劉站, 송참松站)→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동(遼東: 요양遼陽)→안산(鞍山)→해주위(海州衛)→우가장(牛家庄)→사령(沙嶺)→고평역(高平驛)→반산역(盤山驛)→광녕(廣寧)→여양역(閭陽驛)→석산참(石山站)→소릉하(小凌河)→행산역(杏山驛)→연산역(連山驛)→영원위(寧遠衛)→조장역(曹庄驛)→동관역(東關驛)→사하역(沙河驛)→전둔위(前屯衛)→고령역(高嶺驛)→산해관(山海關)→심하역(深河驛)→무령현(撫寧縣)→영평부(永平府)→칠가령(七家嶺)→풍윤현(豊潤縣)→옥전현(玉田縣)→계주(?州)→삼하현(三河縣)→통주(通州)→북경(北京)

1621년(광해군 13)년에 명나라와 후금(後金) 세력이 충돌하면서 요양을 거쳐서 가는 육로가 막히게 되었다. 이에 산동반도의 등주로 건너가는 바닷길이 열렸다.

선천(宣川) 선사포(宣沙浦) 혹은 함종(咸從) 혹은 안주(安州) 노강진(老江鎭)→철산(鐵山) 가도(?島)→거우도(車牛島)→녹도(鹿島)→석성도(石城島)→장산도(長山島)→광록도(廣鹿島)→삼산도(三山島)→평도(平島)→황성도(皇城島)→조기도(?磯島)→묘도(廟島)→등주(登州)→황현(黃縣)→황산역(黃山驛)→주교역(朱橋驛)→내주부(萊州府)→회부역(灰埠驛)→창읍현(昌邑縣)→유현(?縣)→창락현(昌樂縣)→청주부(靑州府)→금령역(金嶺驛)→장산현(長山縣)→추평현(鄒平縣)→장구현(章丘縣)→용산역(龍山驛)→제남부(濟南府)→제하현(濟河縣)→우성현(禹城縣)→평원현(平原縣)→덕주(德州)→경주(景州)→부성현(阜城縣)→부장역(富庄驛)→헌현(獻縣)→하간부(河間府)→임구현(任丘縣)→웅현(雄縣)→신성현(新城縣)→탁주(?州)→양향현(良鄕縣)→대정점(大井店)→경도(京都)

배를 타고 3,760리, 다시 육로(陸路)로 1,900 리에 이르는 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는 선천의 선사포까지 올라가지 않고 증산(甑山)의 석다산(石多山)에서 배를 띄웠다. 한편 1637년(인조 15)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이후 1645년(인조 23)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할 때까지는 조선 사신은 심양(瀋陽)까지만 왕래하였다. 1645년 황제가 북경의 자금성에서 생활하면서 조선 사신은 심양을 거치지 않고 요양(遼陽)→안산(鞍山)→경가장(耿家庄)→우가장(牛家庄)→반산(盤山)을 거쳐 광녕(廣寧)에 이르는 지름길을 택하였다. 1661년(현종 2) 심양에 성경봉천부(盛京奉天府)가 설치되었고, 1665년(현종 6)부터 조선 사신은 심양을 지나야했다

이후 1679년(숙종 5) 청나라가 바다를 방어하기 위해 우가장에 진지를 설치하면서, 조선 사신들은 성경(盛京)에서 고가자(孤家子)→백기보(白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廣寧)에 이르는 길로 돌아가야 했다. 이로써 요양→심양→광녕에 이르는 청나라 때의 기본 노정이 확정되었다..

압록강(鴨綠江)→진강성(鎭江城)→탕참(湯站)→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통원보(通遠堡: 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양(遼陽)→십리보(十里堡)→성경(盛京)→변성(邊城)→거류하(巨流河: 주류하周流河)→백기보(白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廣寧)→여양역(閭陽驛)→석산참(石山站: 십삼산十三山)→소릉하(小凌河)→행산역(杏山驛)→연산역(連山驛)→영원위(寧遠衛)→조장역(曹庄驛)→동관역(東關驛)→사하역(沙河驛)→전둔위(前屯衛)→고령역(高嶺驛)→산해관(山海關)→심하역(深河驛)→무령현(撫寧縣)→영평부(永平府)→칠가령(七家嶺)→풍윤현(豊潤縣)→옥전현(玉田縣)→계주(?州)→삼하현(三河縣)→통주(通州)→북경(北京)

한편 조선 사신이 북경에서 열하(熱河)로 연장한 일이 2번 있었다. 그것은 1780년(정조 4)의 건륭제 고희 축하사절과 1790년(정조 14)의 건륭제 팔순 축하사절 때의 일이다. 1780년에는 북경에서 고북구(古北口)→밀운(密雲)→난하(?河)를 거쳐 열하로 갔는데,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이 가서 유명해진 길이다. 한편 1790년에는 북경까지 갈 시간적 여유가 없어 심양에서 주류하(周流河: 거류하巨流河)를 건넌 뒤에 신점(新店)→세하(細河)→의주(義州)→조양현(朝陽縣)→건창현(建昌縣)→평천주(平泉州)→홍석령(紅石嶺)를 거쳐 열하에 이르는 노정이었고, 돌아올 때는 고북구를 거쳐 북경으로 내려와 귀환했기 때문에 조선 사신의 발길이 단 한 차례만 남겨진 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