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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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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 단계

북경 체류기

<연행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소장. 북경의 모습.

북경의 관소에서 머무르다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조선 사행은 북경의 관소에 40일만을 머무를 수 있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정해진 기한이 없어졌는데, 1703년(숙종 29)에 이르러서는 60일이나 머무르는 일도 있었다.

청나라에 이르러 바깥출입이 허용되다

유리창의 현재모습

명나라에서는 사신들이 숙소 바깥으로 나가는 일을 엄격하게 금지시켰지만, 청나라에 이르면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사행의 바깥출입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삼사는 공식 일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 문물을 비롯한 이단 사상이나 청나라 문물에 관심을 보였다는 혐의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여 될 수 있으면 관소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북경 시내를 구경하기도 하였지만, 그곳에서의 감상도 자세히 표현하지도 않았다. 1832년 서장관으로 연행한 김경선은 정사ㆍ부사와 함께 서양 선교사들이 포교하던 서천주당(西天主堂), 책력(冊曆: 달력)을 찍는 시헌국(時憲局), 코끼리를 기르는 상방(象房)을 구경하고, 책과 문방구를 팔던 유리창(琉璃廠) 거리, 송나라의 충성스러운 장군 악비(岳飛)를 모신 사당 악왕묘(岳王廟)를 둘러보고 있는데, 앞서 연행했던 김창업ㆍ홍대용ㆍ박지원 등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감을 대신하고 있다.

반면 천하의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여 자제군관으로 따라 나선 일군의 학자들, 김창업ㆍ홍대용ㆍ박지원 같은 이들은 관소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서양 문물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은 천주교 성당인 천주당(天主堂), 서양인 신부가 책임자로 있던 국립관상대인 흠천감(欽天監), 러시아 사신들이 묵는 악라사관(顎羅斯館) 등을 방문하였다. 조선 사신들은 그곳에서 서양인들의 의식주와 풍속ㆍ기예ㆍ학문ㆍ종교와 관련된 다양한 견문을 얻었다. 보다 적극적인 사람은 서양에서 만들어진 기구와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서 적을 얻어오거나 서양선비[西士]로 불리우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중국어에 능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통역을 통하거나 한문을 이용한 필담으로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물어 답을 얻기도 하였다.

돔형태의 지붕이 돋보이는 남천주당의 모습

관상대에 있는 적도경위의

유명한 학자와 만남을 시도하다

문장과 학문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북경에 있는 유명한 학자와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기윤(紀昀)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만나보고자 하던 대표적인 청나라 학자였다. 1790년의 유득공(柳得恭)과 박제가(朴齊家), 1794년의 홍양호(洪良浩)와 홍희준(洪羲俊) 부자, 1799년의 서형수(徐瀅修) 등이 그를 만나 시와 글을 주고 받았다. 책에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책을 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유리창에 가서 직접 책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이 있는 경우에는 현지의 서반(序班)이나 중국의 지인에게 목록을 주어 구매를 부탁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