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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중국과 중국문화

중국 주생활

연행사들은 중국의 가옥 제도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대부분의 연행록에는 조선과는 다른 중국의 주거 생활이 묘사되어 있는데, 특히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와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비교적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연행사들이 본 중국의 가옥제도는 단순히 이국 문물에 대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18세기 이후 대부분의 연행사들은 중국의 가옥제도와 우리나라의 가옥제도를 상세히 비교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중국 가옥의 실용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모범으로 하여 조선의 가옥제도를 혁신시킬 것을 주장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는 그 대표적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일자형 토옥

[일자형 토옥]

책문 안쪽에서부터 고려총(高麗叢)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띳집이고, 요동 이후는 띳집과 기와집이 반반이며, 여양역(閭陽驛)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는 흔히 들보 없는 흙집들이다. 초옥의 제도는 풀이나 수수깡을 쓰는데 모두 엮지 않고 묶어서 덮는다. 흙집을 꾸리는 방식은 먼저 벽돌을 쌓아 네 벽을 만들고, 이 벽 위에 서까래를 가로질러 놓았을 뿐 들보는 쓰지 않는다.

일자형 토옥(一字形 土屋)은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에 따르면 “주류하로부터 산해관까지는 토옥(土屋)이 많다. 토옥이 나타난 이후로는 이따금 와가(瓦家)는 있어도 초가(草家)는 결코 볼 수 없다. 이을 풀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아 주류하부터 산해관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옥은 들보[樑]를 얹지 않고 지은 집을 무량옥(無樑屋)이라고 칭했다.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도 “토옥의 제도는 벽돌을 쌓아 네 벽을 만들고, 이 벽 위에 서까래를 가로질러 놓았을 뿐 들보는 쓰지 않았다.”고 하여 서까래만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토옥의 지붕 맨 윗부분은 진흙을 평평하고 두껍게 쌓아두는 정도이다. 그래서 사행인들의 눈에는 풀이나 기와도 얹지 않은데다 구배도 없이 평평하면서도 지붕 처리를 한 것이 이상하게 보여 비가 오면 샐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정중의 『연행록(燕行錄)』에는 무량옥의 지붕 만드는 법을 설명하면서 바닷물이 든 짠 흙이나 백회를 지붕 위에 바르기 때문에 새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는 토옥이 빗물이 샌 흔적이 있다고 지적하며 농촌의 경제적 여건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합원

[사합원]

중국의 가옥(家屋)은 모두 일자(一字)형 집으로 되어 있어, 구부리거나 연이어 덧붙이거나 하는 법이 없다. 첫 번째 집채는 내실(內室)이고, 두 번째는 중당(中堂), 세 번째는 전당(前堂), 네 번째는 외실(外室)이다. 각 집채마다 전면 좌우에 곁채[익실(翼室): 좌우에 잇는 날개집]을 지어, 낭무(廊廡: 정전 아래에 부설한 바깥채)와 요상(寮廂: 광과 행랑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각 집채의 정 가운데 한 칸으로 출입하는 문을 만들었는데 반드시 앞문과 뒷문이 똑바로 마주보도록 하였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내실 문으로부터 외실 문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박지원은 “‘저 중문(重門)을 활짝 열어라. 내 마음이 그와 같아라!’라는 말은 바로 사람의 곧바름을 집으로 비유한 것이다.” 라고 한 바 있는데, 이는 일자형 가옥 구조의 특징을 잘 드러낸 말이다.

일자형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은 북경의 사합원(四合院)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 가옥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인 사합원은 일직선상에 건물이 가지런하게 세워져 안정감 있고 질서정연하다. 북경의 사합원은 도시 개발과 함께 대부분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는데, 근래에 중국 정부에 의해 국가중점 보호문물로 지정돼 ‘문물보호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집을 짓는 방법

중국의 집을 짓는 방법을 보면, 대지를 청소하고서 달구로 다진 다음에 다시 평탄하고 바르게 땅을 깎은 뒤에 대(臺)를 쌓았다. 대의 기초는 모두 돌이며 일층 또는 이층ㆍ삼층으로 쌓았다. 어느 것이나 벽돌을 쌓고서 바윗돌을 다듬어 가장자리를 두르고, 그 기초 위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대(臺)를 쌓지 않고 주춧돌을 놓는 법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옥이 변형되거나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기와는 궁전ㆍ관청ㆍ사관(寺觀)이나 친왕(親王)과 부마(駙馬)의 집들은 모두 원앙와(鴛鴦瓦)를 쓰고, 일반 사가(私家)에서는 암키와만을 쓴다. 기와는 한 번은 젖혀 깔고 한 번은 엎어 깔아 서로 암수가 되게 하며, 회(灰)를 이용하여 기와 틈을 메운다. 한 켜 한 켜 사이를 단단하게 붙이기 때문에, 진흙을 이용하는 조선과 달리 참새나 뱀이 지붕을 뚫지 못한다.

중국의 온돌 제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각별한 관심을 보인 중국의 온돌 제도를 살펴보면, 먼저 한 자 남짓 높이로 온돌의 기초를 쌓고 바닥을 평평하게 고른다. 그런 다음 벽돌을 잘라 바둑돌을 놓듯이 굄돌을 놓고서 그 위에 벽돌을 깐다. 방고래는 높이가 겨우 손을 뻗쳐 드나들 정도이므로 굄돌이 번갈아가면서 불목구멍이 된다. 불이 불목구멍을 만나면 안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넘어 들어간다. 불꽃이 재를 휘몰아서 세차게 들어가면 많은 불목구멍이 번갈아 삼켜 연달아서 전해주므로 거꾸로 나올 겨를이 없이 굴뚝에 이르게 된다. 굴뚝에는 깊이가 한 길이 넘는 고랑이 하나 파져 있다. 재는 언제나 불길에 휩쓸려 방고래 속에 가득 떨어지는데, 3년에 한 번씩 온돌을 열어 그 일대의 재를 쳐 낸다고 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온돌 제도를 자세히 설명한 뒤에, 진흙과 돌을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온돌 제도의 6가지 결함을 제시하고 견고하지 못하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조선 온돌 제도의 개량을 주장하였다.

가옥 형태

중국 가옥의 문에는 반드시 발[簾]을 쳤다. 재료는 말총으로 짠 것이나 청포(靑布) 혹은 흰 바탕에 오색 비단으로 가를 두르기도 한다. 길이와 너비는 문호(門戶)와 꼭 같아서 바람이 몹시 불어도 별로 흔들리지 않는다. 잠자는 온돌에는 모두 장막을 친다. 무명을 쓰거나 베를 쓰는데, 낮에는 걷어 올렸다가 밤이면 다시 내려친다. 온돌방에는 여름에는 대자리, 겨울에는 담요를 까는데, 길이와 너비는 온돌 크기에 맞추며 꽃무늬가 현란하다.

객당(客堂)에 벌여 놓은 의자와 탁자들은 모두 붉은빛을 띠고 결이 고운 무늬목으로 된 것을 쓴다. 의자는 자단(紫檀)을 소재로 제작한 남관모의(南官帽椅)로 등받이가 높은 것이 특징이며, 구유ㆍ보료 등 각색 짐승 털로 만든 담요를 깔기도 한다. 탁자의 다리는 네 개로 사각을 이루고, 높이가 세 자 이상이다. 연회를 열 때는 반드시 의자나 긴 의자에 둘러앉게 되는데, 이때 중앙에 탁자를 설치하여 술잔이나 그릇을 올려놓는다.

정원(庭園)은 모두 벽돌을 깔기 때문에 비가 내려도 질퍽거리지 않는다. 가난하여 벽돌을 깔 수 없는 중국 민가의 오래뜰[문정(門庭): 대문 앞의 뜰]에는 유리와(琉璃瓦) 부스러기나 물가에 있는 조약돌을 가져다 깔아 진흙이 질퍽거림을 막았다고 한다.